적자생존
작품명: 상권의 장례식
제작 시기: 유동인구가 많아야 하는 주말 오후
재료: 쇠락한 상권, 폐업, 적자생존
설명: 주말 오후, 유동인구가 없는 쇠락한 상권의 쓸쓸함을 어두운 색채와 ‘임대’ 안내문으로 극대화해 표현했다.
2전시실의 두 번째 작품 <상권의 장례식> 앞으로 왔습니다. 먼저 봤던 <맛집의 탄생>과 연결고리가 있는 작품입니다. 맛집은 잘 나가는 상권에 있기 마련이니까요.
개인적으로 회사 근처에 제가 맛있게 먹던 라멘집이 있었는데요, 한동안 일이 한창 바빠 가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라멘이 당겨서 점심시간에 방문하려고 했습니다만, 웬걸 가게는 온 데 간데없고 ‘임대’ 안내문만 붙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가게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인 걸 보니 상권 자체가 ‘죽은’ 느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임대 안내문은 마치 ‘상권의 부고장’ 같기도 하네요.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렸지만, 실제로도 우리 도시에서는 상권의 탄생과 죽음, 흥망성쇠가 빠르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별거 없었던 지역이 오늘 갑자기 힙한 상권이 되고, 오늘 트렌디한 상권의 상징이었던 곳도 내일이면 황량해지는 게 요즘입니다.
어찌 보면 매력 있는 상권은 살아남고 매력 없는 상권은 사라지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우리 도시 상권의 흥망성쇠를 <상권의 장례식>을 통해 함께 감상하며 더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도시(都市)’는 ‘도읍 도’ 자에 ‘저자 시’ 자를 씁니다. 예로부터 시장에서의 상업활동은 도시의 핵심 기능 중 하나였습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교류, 화폐의 순환, 다른 지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며 도시를 한층 활기차게 하죠. 이런 상업 활동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상권'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 상권은 도시의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시민들의 문화·여가 생활을 지탱하여 도시의 매력을 높이는 핵심적인 공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각 도시의 상권이 인기가 많아지면 그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상징성을 갖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핫플레이스가 그렇습니다. 서울에는 명동, 홍대, 이태원, 성수동 등이, 수도권 밖에서는 경주의 황리단길, 전주의 한옥마을 등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이런 유명한 상권도 늘 잘 나가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가로수길’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가로수길은 2010년대 문화 트렌드를 대표하는 상권이었습니다. 관악구의 ‘샤로수길’처럼 이름을 차용한 곳이 있을 정도였죠. 당시 가로수길에는 트렌디한 옷가게, 레스토랑, 카페가 모여 있어 패션의 성지이자 젊은 커플들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았습니다. 여기에 힘입어, 2010년부터 2014년 사이 4년 동안 방문객 수가 무려 21.3%가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가로수길의 공실률은 41.6%에 달합니다. '가로수길 중심거리를 걷는 동안 겨우 행인 10여 명을 보았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예전의 활기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상권의 장례식>에서 표현하고 있는 쓸쓸함이 느껴지죠.
가로수길 상권의 쇠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지만, 가장 주된 원인으로 꼽는 것은 바로 온라인 쇼핑의 약진과 특색 있는 점포의 폐업, 높은 임대료 등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온라인 쇼핑몰이 잘 되어 있어서 오프라인 가게를 찾는 유동인구가 많이 줄었습니다. 게다가 과거 가로수길을 찾게 했던 아기자기한 로컬 점포들이 임대료 상승으로 인해 뒤로 밀려나고, 대형 브랜드 중심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개성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체험과 다양성을 찾는 MZ세대의 방문이 발걸음도 줄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핫한 성수동 상권은 어떨까요? 과거 성수동은 본래 공장지대였고, 특히 제화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옛 공장과 창고를 활용한 이색적인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 등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201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흔적과 상업 공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마치 뉴욕의 ‘브루클린’과 비슷한 분위기를 줘서 ‘서울의 브루클린’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인디 브랜드, 감각적인 가게와 갤러리 같은 다양한 문화공간이 함께 모여 있는데요, 성수동의 또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바로 ‘팝업스토어의 성지'입니다. 성수동 상권에서는 갈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지루할 틈이 없어서 오늘날 상권의 활성화를 주도하는 MZ 세대와 결이 잘 맞죠. 공실률이 41.6%인 가로수길과 대조적으로 성수동 상권의 공실률은 3.4%에 불과합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지는 상권’과 ‘뜨는 상권’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소비 문화의 변화에 잘 적응하는 상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죠.
결국, 사회적인 흐름에 잘 적응하는 건 상권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상황을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vert Spencer, 1820~1903)가 다윈의 진화론에서 영감을 받아 처음 사용한 용어입니다. 다윈이 창안한 용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적자생존의 원조는 스펜서입니다!
스펜서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진화의 법칙을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입니다. 마치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진화하듯, 우리 사회도 단순한 구조에서 점차 복잡한 제도와 조직을 갖춘 사회로 진화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의 모두가 농사만 짓던 단순한 전근대사회가 규모가 커지고 기능이 다양해진 근대사회로 이행한 것처럼 말이죠.
여기서 그는 적자생존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강한 종이 살아남는다'는 뜻보다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는 의미가 더 정확합니다. 약육강식이랑은 달라요! 높은 나뭇잎을 먹기 어려운 목 짧은 기린은 자연도태되고, 목이 긴 기린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는 유명한 예처럼, 변화하는 조건에 맞게 적응한 개체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장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기업이 성장하고, 산업구조 변화에 적응하는 도시가 번창하며, 사회에 필요한 기술을 익힌 개인에게 취업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기업, 국가, 개인 너나 할 것 없이 '적응 능력'은 중요한 요소이죠.
이런 맥락에서 스펜서는 더 나은 사회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환경에 잘 적응해 경쟁에서 살아남은 우수한 사람들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국가의 역할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런 국가의 간섭은 사회의 필요한 적응을 교란시켜서, 인류의 가치를 저하 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최소한의 국가 개입과 자유방임(laissez-faire)의 원리 아래 경쟁하면서 적자가 생존해야 최고의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설명을 들으시면서도 느끼시겠지만,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이나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무책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될 위험이 크다는 비판을 받으며, 오늘날에는 이론적인 영향력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상권의 흥망성쇠와 연결했을 때, 일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죠. 결국 변화하는 소비 문화에 적합한 상권이 오래 살아남는 것이니까요. 코로나 때 ‘이제 끝났군’ 생각했던 명동 상권도 K-문화의 확산과 함께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상권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취향, 소비 방식, 기술의 변화,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면 상권도 그에 따라 흔들리거나 활성화됩니다. 깨끗하게 정비된 번화가보다 이색적인 과거의 옛 모습, 즉 레트로함이 살아있는 신당동이 입소문이 나면서 ‘힙당동’으로 부상한 것도 시대적 분위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떠오르는 상권도 그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하긴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유행의 사이클도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은 MZ 세대를 필두로 한 성수동이 팝업스토어의 성지가 되었을지라도, 임대료 인상률에 규제를 받지 않는 팝업스토어의 단기 임대방식이 상권 전체의 임대료를 올리고 있어 우려됩니다. 2024년 기준 성수동 일대 상권 임대료는 1년 사이에 30% 이상 상승했습니다.
이렇게 임대료가 오르면, 기존에 있던 특색 있는 가게는 밀려날 수밖에 없고, 그 자리에는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나 대형브랜드가 들어오게 되죠.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가로수길과 비슷하지 않나요? 이렇게 외부인의 자본이 유입되고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기존 주민과 소상공이 떠나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지역의 매력과 정체성이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하죠. 상권으로서는 생사를 가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동구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2016년부터 성수동에 상생과 임대료 안정을 유도하는 일명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법적 구속력이 약해 효과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진화를 위해 적자생존을 제시한 스펜서는 자유로운 경쟁에 그 무엇도 개입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실제 상권에서는 자본의 규모에 따라 경쟁 자체가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경쟁이 진짜 '자유'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며 성장한 상권이 자본 경쟁과 임대료 상승 등의 외부 요인으로 쇠락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상권이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도록 적절한 지원과 조정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활기를 잃은 <상권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어떤 상권이 살아남고, 또 어떤 상권이 다시 일어설지 지켜보는 것은 도시가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지 살펴보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 같군요. 지금은 쓸쓸해졌지만 추억이 남아 있는 옛 상권에 잠시 조문을 다녀와야겠습니다.
“만약 사회에 법칙이 없다면, 그 현상에는 질서도 확신도 체계도 있을 수 없다. 만약 법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우주의 법칙과 비슷한 확실하고 불변적이며 예외가 없는 것이다.”
- 하버트 스펜서, ≪사회 정학≫, 1851 -
하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진화의 원리를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 사회진화론적 개념이다. 그는 자연세계에서 환경 변화에 적응한 개체만이 살아남듯, 사회에서도 변화에 적합하게 적응하는 개인·집단·제도가 생존하고, 이를 통해 사회가 발전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적자(適者)’는 힘이 센 존재가 아니라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존재를 의미한다. 스펜서는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개개인의 경쟁에 국가의 보호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적응 능력’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설명하는 적자생존 개념은 여전히 경영, 지역 발전, 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주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