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의 휴식

생활세계

by 김신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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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공원에서의 휴식

제작 시기: 휴식이 필요한 일상 중

재료: 번잡한 일상에서의 휴식이 필요한 사람, 도시공원, 생활세계

설명: 도시 속 공원에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은 채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표현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입니다.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 그리고 가야 할 곳 투성이인 도시에서의 삶은 항상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것들로 꽉 차 있죠. 경쟁과 업무 성과 지표에 치이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실시간으로 이동 시간을 계산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시 한가운데에서 신기하게도 우리의 머릿속을 번잡하게 하고, 우리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이게 하던 모든 것들이 잠시 멈추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공원이죠! 저희 앞에 있는 <공원에서의 휴식> 속 사람들은 시끌시끌한 도시의 삶을 잠시 잊은 듯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공원에 들어서면 우리는 더 이상 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져 있지도 않고,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도 느슨해집니다. 시간을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정처 없이 슬렁슬렁 걷다 보면, 어느새 벤치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늘 무언가를 쉼 없이 계산하며 살아가던 도시의 삶이 왜 공원에만 오면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해지는 것일까요?



과학적인 도시와 인간성의 위기


오늘날의 도시는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화와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범죄, 위생, 공동체 해체, 양극화와 같은 새로운 도시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계획’이라는 분야가 탄생했고, 도시는 점차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교통량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도로의 폭과 길이는 정밀하게 계산되고, 주거지는 비용과 편익 분석을 바탕으로 개발되며, 도시 정책과 행정의 전반은 항상 과학적 합리성을 지향합니다.

이 안에서 도시인들은 도시를 가득 채운 수학과 과학적인 운영 방식을 마치 원래부터 자연스러운 질서였던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구불구불한 길을 반듯하게 펴고 싶고, 불규칙하게 세워진 오래된 집들을 밀어버린 뒤 깔끔하게 주택단지를 다시 짓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도 하죠.

근대 건축계에 큰 영향을 미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는 ‘직선은 인간의 길이고, 구부러진 것은 당나귀의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목적을 가진 인간은 가장 효율적인 경로인 직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명확한 기능과 성과를 추구하며,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관리하고자 합니다. 그 결과 도시는 점점 삭막해지고, 회색빛의 공간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때 도시공원은 이런 도시의 삶 속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다시 초록빛으로 물들이는 공간입니다. 산이나 바다로 이루어진 자연공원과 달리 도시공원은 수학적이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도시 속에 위치한 인공적인 자연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에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궁전 안에 자연을 모방해서 정원을 가꾸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공원의 역사는 참 오래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공원이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개방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죠.

대표적으로 1876년에 완공된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가 떠오르는데요. 약 3.41㎡ 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과 비슷한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진 도시공원입니다. 당시 뉴욕은 도시계획가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 1927~1929)를 필두로 빈민가를 철거한 곳에 쭉쭉 뻗은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강 위에 여러 다리를 놓는 등, 뉴욕을 뒤집어엎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가뜩이나 개발할 곳도 부족한데, 저렇게 큰 공원이 왜 필요하냐’는 비판도 거셌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센트럴 파크가 없었다면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라고 할 정도로 센트럴 파크는 뉴욕 시민들에게 삭막한 도시의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L1xy7o3trCfn8xJfIX0asb2_4FE 눈 뜨고 코 베일 것 같은 뉴욕에서 한가로움을 선사하는 센트럴파크


이처럼 공원은 도시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생활 인프라로 자리 잡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도 1인당 도시공원 면적은 2000년 5㎡에서 2024년 12.8㎡까지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생활세계


유독 공원이라는 장소가 번잡한 도시와 단절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드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게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후설은 현대 철학의 한 학파로 자리 잡은 현상학(phenomenology)의 창시자입니다.

현상학은 말 그대로 현상, 즉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사건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현상학은 자연과학에만 의존해서 현상을 파악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발전했는데요. 후설은 19세기 후반 근대인들의 세계관이 과학에 기반을 둔 실증적인 학문에 독점되고 있는 상황을 ‘학문의 위기’라고 진단했습니다.

실증주의는 사회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에 의해 주장된 관점입니다. 그는 인간의 행태이던 사회적 현상이던 모든 것이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측정될 수 있고 물리적인 현상처럼 증명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사회물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실증주의의 대두와 함께 우리가 일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자연스럽게 과학만능주의적인 세계관에 기초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다는 것이 당시 후설의 생각이었죠.

예를 들어, 우리는 방문객, 만족도, 수익 등 각종 계산가능한 지표를 통해 점수가 높은 축제를 자연스럽게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상학은 이런 태도를 비판하며, 실제 사람들이 어떻게 그 축제를 경험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떤 의미로 인식되었는지는, 즉 축제라는 현상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AKR20250304067500004_01_i_P4.jpg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축제의 성과는 수치로 요약된다


이런 맥락에서 후설은 생활세계(life-world)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요. 생활세계는 우리가 어느 학문이나 지식을 습득하기 이전에 이미 감각과 직관을 통해 살아가고 있는 세계입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이 생활세계에서 출발해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과학이라는 도구가 우리의 세계 그 자체를 대신하게 되었고,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진리로 우뚝 서면서, 우리의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경험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상학은 과학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적인 지식만이 우리의 세상을 객관적이고 제대로 포착한다는 견해에 반대하는 것이죠. 후설은 생활세계를 망각하고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의 근간인 생활세계를 다시 기억해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시의 여백에서 세상을 느끼다


현상학의 생활세계 개념으로 보면, 공원은 계산과 효율이 전제로 깔려있는 도시에서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원 역시 계획적이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긴 합니다. 나무를 어디에 심을지, 벤치를 얼마만큼의 간격으로 배치할지 등 계산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과학적으로 재단된 공원이라는 장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출근길 막히는 도로 위에서 목적지까지 몇 분 남았는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가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며 계산하던 우리도 공원에만 가면 세상을 더 세심하고 감각적으로 경험합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장면을 ‘만유인력’이라는 하나의 관점에 가두지 않고, 그저 그 자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듯 무언가를 꼭 해야 할 필요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공원은 우리의 생활세계를 되살리는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죠.

서울의 경의선 숲길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근대의 산물인 철도의 흔적이 선형 공원이 되어 산책과 사색의 공간으로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발전한 수학과 과학의 결정체가 지나던 곳이 오히려 수학과 과학 이전의 생활세계로 바뀐 것이 참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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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주의할 점도 있는데요. 공원이 지나치게 이용률, 동선 효율, 상업성 같은 지표로 이해되는 순간, 생활세계였던 공원은 다시 삭막한 도시의 일부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공원에서는 단순한 숫자보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원을 더 쾌적하게 조성하기 위한 계획이 필요하더라도, 일단 우리가 거기에서 ‘생활’하는 게 먼저입니다.

살아가는 도시는 ‘도시 경쟁력’이라는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 효율적이고, 더 과학적이며, 더 부유한 도시로 가는 길 위에서 우리 역시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도시에 공원은 더욱 필요하죠. 한창 세계도시로 성장하던 뉴욕의 심장에 광활한 공원을 남겨둔 것처럼, 공원은 우리 도시가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여백입니다.

번잡한 도시생활, 오늘은 가시는 길에 공원에 살짝 들려보는 것이 어떨까요? <공원에서의 휴식>에 표현된 것처럼 벤치에 가만히 앉아 아이들의 웃음소리, 풀내음, 바람의 감촉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가 아직 인간의 세계임을 보여주는 일상의 순간이니까요.



도슨트의 인문사회학 노트 21: 생활세계


“갈릴레이에게서 이미 중요한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유일한 실제적 세계, 지각을 통해 현실적으로 주어진 세계, 언제나 경험되거나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즉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세계 대신에 그 자리를 수학적으로 구성된 이념들의 세계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 말이다.”

- 에드문드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1936 -


후설이 이야기 한 생활세계는 지식과 학문이 세계를 설명하기 이전, 직관과 감각, 그리고 의미로 가득 찬 우리의 삶의 무대다. 우리는 컵을 들 때 무게를 느끼고, 길을 걷는 중에 익숙함과 낯섦을 구분하며, 타인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낸다. 이 모든 경험은 어떤 진리나 이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후설은 근대 학문이 이처럼 당연한 생활세계를 점차 망각해 왔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세계를 점점 더 정확하게 측정하고 분석하는 동안,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의미 있는 세계’로 경험하게 되는지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었던 과학이 모든 지식과 판단이 시작점인 것처럼 여겨지면서 우리의 감각과 경험, 그리고 인간성은 점차 밀려나고 있다. 이에 후설은 주객전도된 세계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고 보았다. 현상을 이론과 지식으로 재단하기 전에,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고 경험되는지를 생각하며 잊혔던 생활세계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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