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속화
작품명: 평일의 교회
제작 시기: 평일 오후
재료: 종교, 교회, 탈세속화
설명: 평일 오후 교회에서 열린 음악회와 중앙에 위치한 십자가와 어우러지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감상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만 놓고 보면 이 공간을 아트홀로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무대 한가운데 아트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평일의 교회>는 음악회가 열리는 교회의 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엄숙함과 경건함을 떠올립니다. 그 이미지는 대체로 주일 예배에서 비롯되죠. 하지만 사실 우리는 평일의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도시 곳곳에 자리한 교회에는 주일이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요. 그중엔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작품에 속 장면처럼 교회에서는 평일에 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교양 강좌를 진행하기도 하며, 또 카페를 운영하기도 합니다. 지역 주민들이 누구나 편히 오갈 수 있게 문턱을 낮춘 교회는 일종의 지역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문턱이 낮아진 교회를 보면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교회가 너무 세속적인 것 아니야?” 평일의 교회는 주일의 교회보다 종교적인 색깔이 옅어 보입니다.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종교의 성스러운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다루고 있는 작품들의 배경은 모두 ‘도시’입니다. 도시는 뭔가 차갑고 날카로우며 세속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죠. 이런 이미지는 아무래도 우리가 바라보는 종교와는 상극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흔히 도시가 발전할수록 종교의 역할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근대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이성으로 어둠을 비춘다’는 모토의 계몽주의와 함께 등장한 근대성은 산업화, 자본주의, 과학적 사고, 합리성, 개인주의를 촉진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이런 근대성의 특징들이 과거의 관습과 미신을 몰아내면서 우리 사회를 ‘탈주술화(disenchantment)’시킨다고 보았죠. 신비와 초월적인 힘 대신 계산과 효율이 지배하는 세상의 중심 무대는 바로 도시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도시는 종교와 미스매치인 것처럼 여겨지죠.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가 도시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거든요. 1880년대부터 미국 같은 개신교 국가들의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는데요. 1920년에 개신교 인구는 3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1960년대부터 80년대 사이에 개신교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기간은 우리나라의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던 시기죠. 10년마다 교인 수가 두 배씩 증가하고, 70년대 후반에는 매일 6개의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도시가 계속 발전하면서 개신교는 오늘날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교인 수를 가진 종교가 되었습니다.
도시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는 당장 시내에 나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국의 교회 수는 총 5만 4천 여개로 편의점 수와 비슷합니다. 한 건물에 한 두 개씩 있는 상가 교회, 아파트 단지에 붙어 있는 중형교회, 엄청난 부지를 자랑하는 거대한 대형교회까지 도시는 다양한 유형의 교회로 촘촘히 채워져 있습니다. 밤이 되면 수많은 십자가가 불을 밝히는 도시의 풍경을 보고 외국인들이 “왜 이렇게 무덤이 많지?” 생각할 정도니까요.
도대체 개신교는 이 세속적인 도시에서 어떻게 이렇게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요? 그건 도시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했습니다. 혈연과 지연이 끊긴 낯선 공간에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가 오가며, 소속감이 만들어지는 공동체였죠.
도시가 더 발전하면서 교회의 역할은 오히려 더 두드러졌습니다. 아파트가 지어질수록 이웃 간의 교류가 줄어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수록 개인화되어 가는 도시에서 교회는 파편화된 인간관계를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같은 지역 사람들끼리 소모임 활동도 하면서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죠.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의 교회에는 도시인들을 위한 더 다양한 기능들이 탑재되었다는 점입니다. 예배가 없는 평일에 교회는 카페, 문화센터, 공연장, 그리고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도시의 유용한 생활 인프라로 자리 잡았습니다.
도시와 함께 성장한 우리나라 교회의 양상은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 Berger, 1929~2017)의 탈세속화(desecularization) 개념과 일맥상통합니다. 1950~60년대에는 역사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을 필두로 종교의 세속화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세속화론자들은 과거 인간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하던 종교가 근대화 이후 정치·경제·제도·문화와 분리되면서 그 영향력을 계속 상실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실제로도 세계 여러 곳곳에서 종교와 정치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종교를 미신적 혹은 역행적으로 여기거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가 상당 부분 현대화되는 등, 세속화론자들의 생각이 맞는 듯했습니다.
저명한 종교사회학자로서 버거도 한때 세속화론의 주요 옹호자였습니다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기존 입장을 수정하게 됩니다. 근대화가 종교의 쇠퇴로 이어질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오늘날의 세상이 종교성을 상실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는 물론 고도로 발달한 유럽의 도시에서도 이슬람교가 부흥하고, 남미에서는 복음주의 기독교의 위세가 더 강력해지는 등의 사례를 통해 버거는 세속화론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했죠. 그는 이렇게 종교의 영향력이 현대 사회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경향성을 ‘탈세속화(desecularization)’로 개념화했습니다. 탈세속화란 종교가 과거처럼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는 권위를 회복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가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죠.
버거는 세속화된 세상에서 종교가 힘을 발휘하고 있는 배경을 크게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는 근대성에 의한 불안입니다. 중세 시대 사람과 요즘 사람 중에 누가 더 불안할까요? 중세 시대에는 뭐 별 거 없습니다. 그냥 해 뜨면 나와서 농사짓고 배고플 때 밥 먹고, 해지면 집에 돌아와서 기도하고 자면 됩니다. 이런 일상이 평생 반복되죠. 너무 삶이 일정해서 불안을 느낄 새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어떤가요? 재테크 고민, 결혼 고민, 건강 고민, 커리어 고민 등등 하루에도 수많은 고민들이 머리를 왔다 갔다 합니다. 즉, 계산하고 효율성을 따지는 근대성이 과거의 확실했던 삶의 토대를 뒤엎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이런 불안한 사회에서도 ‘신’이라는 확실한 삶의 방향성을 제공하면서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죠.
둘째로 오늘날의 세속적인 관점에 대한 반발심이 있습니다. 근대성의 주요 가치인 자본주의, 합리성, 과학적 사고와 같은 것들은 소수의 지식인과 엘리트 집단에 의해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미디어를 통해 이런 근대성의 가치는 늘 우월하고 마땅한 것처럼 비치죠. 엘리트 문화를 공유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문화에 분개하는데요. 종교는 엘리트 문화에 대한 반발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게 됩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난한 자, 신분이 미천한 자, 소외된 자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메시지를 전달하니까요.
이렇듯 탈세속화의 핵심은 근대성이 종교를 필연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세속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세속화 경향이 나타나면서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 힘과 세속적인 힘이 상호작용하는 탈세속화 사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과거와 같이 종교와 우리 삶이 일치하는 획일적인 사회는 아니지만, 세속화된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문화 속에서 종교가 나름의 역할을 하며 어우러지는 다원적인 사회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많은 문제들과 엮이기도 합니다. 교회 세습 문제, 정치적 발언, 초대형교회의 기업화와 계급화, 교회 내의 크고 작은 다툼들 등, 이런 문제들은 교회가 세속의 논리와 문화를 그대로 끌어안은 결과입니다. 서로 베풀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입으로 외우지만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 종교인들의 세속적인 이중성에 실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점들은 한국 교회가 결단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죠.
이런 세속화의 어두운 측면을 반성하는 가운데, 교회의 밝은 모습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역사회와 더불어 산다는 마음으로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도시의 일상을 떠받치는 교회도 분명 있습니다. 예배가 없는 평일에 교회는 카페, 음악회, 교양강좌, 무료급식, 주차장 등을 운영하기도 하는데요. 누군가는 이를 보고 교회가 세속의 카페, 아트홀, 학원, 식당처럼 ‘자본주의화’된 것 아니냐고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서비스를 운영하는 데는 자본이 필요하니까요. 그렇지만 대체로 교회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더 저렴하게 혹은 아예 무료로 제공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전한 세속화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일의 예배당은 여전히 종교의 성스러움을 상징하지만, 평일의 교회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따뜻한 커피, 아름다운 음악, 배움의 시간, 든든한 한 끼, 남는 공간을 제공하며 도시의 사회적 인프라로 재탄생했습니다. 우리의 도시적 삶 속에서 교회가 새로운 역할을 찾은 것이죠. 세속적인 듯 세속적이지 않은 세속적인 것 같은 교회의 애매모호한 위치야 말로 탈세속적인 우리 사회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계속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고령화, 1인 가구의 증가, 실업 등의 문제가 있죠. 거대한 국가가 이런 문제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분명 공공영역이 닿지 못하는 공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때 도시의 교회들은 그 도덕적인 기반 위에서 지역사회의 문제에 공감하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촘촘한 도시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시와 교회가 함께 성장해 온 그 역사적 사실처럼 우리 도시는 계속 변하겠지만, 거기에 맞게 공공영역을 보완하고 도덕적 가치를 전달하는 교회 또한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지 않을까요? <평일의 교회>에 표현된 것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음악회 무대 위 은은하게 빛나는 십자가 같이 교회가 세속화된 도시에도 자연스레 스며드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의 세계 정세를 분석하는 데에서 종교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 피터 버거, ≪세상의 탈세속화: 개관≫, 1999 -
피터 버거는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종교가 자연스럽게 쇠퇴할 것이라는 기존의 세속화 가설과 달리, 현대 사회에서도 종교가 여전히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재등장하는 현상을 탈세속화(desecularization)로 설명했다. 버거는 과학과 합리성, 자본주의가 확산된 근대 사회에서 종교가 사라지기는커녕, 개인의 불안과 삶의 불확실성 가운데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고, 엘리트 중심의 세속적 가치에 대한 대안적 언어를 전달하며, 공적·사적 영역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재배치되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탈세속화란 종교가 과거처럼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권위를 회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속화된 정치·경제·제도·문화의 틀 속에 스며들어 다원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의 종교적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