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KBO리그는 전통의 명가이자 한국 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인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특히 한국시리즈 상대가 역시 명문 구단인 삼성 라이온즈(외래어 표기법은 ‘라이온스’가 맞지만, 등록된 공식 구단 명이 ‘라이온즈’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라이온즈’로 표기한다.)였기 때문에 더 관심을 모았는데, 한국시리즈에서만큼은 타이거즈에게 늘 눌려 있었던 라이온즈는 이번에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이미 플레이오프를 거쳐 지쳐 있었고 투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코너와 최지광, 구자욱 등이 부상으로 빠진 상태에서는 타이거즈의 막강전력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타이거즈의 12번째 우승. 그야말로 한국 프로야구의 최고 명문 팀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냈고, 12번 한국시리즈에 올라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하는 진기록도 이어가게 되었다.
기아 타이거즈의 정규리그/한국시리즈 통합 우승
올 시즌 KBO리그는 다원화되고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현대 사회, 특히 먹고 살기 바쁘고 놀 거리 많은 한국 사회에서 도저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천만 관중을 돌파했고, 이는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의 일이기도 하다. 프로야구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최고 인기 스포츠로 발돋움 한 것이다.
사상 최초로 천만관중을 돌파한 2024 KBO리그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20여 년 전인 1990년대 후반부터 KBO리그는 젊은 층으로부터 외면 받던 위기의 시기가 있었다. 3시간이 넘는 게임 시간, 다른 구기종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룰, 자칫하면 하품이 나오는 지루한 경기전개, 오랫동안 경기를 보기에 너무나 불편한 야구장과 TV 중계의 외면. 이런 까닭에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한 때 왕조를 구가했던 현대 유니콘스의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홍역을 치르기도 했고, 바쁘면서도 놀 거리가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 할 일 없는 ‘꼰대’들의 스포츠로 전락하며 몇몇 구장에서는 관중 수보다 취재진과 보안 요원의 수가 더 많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까지 나왔다. 야구장 티켓을 구하려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참 격세지감이다.
침몰해 가고 있던 한국 프로야구를 구한 것은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이었다. 야구의 위기는 우리나라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어서 점점 인기가 시들해가던 메이저리그 때문에 고민하던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축구의 월드컵과 같은 국제대회를 기획해서 만든 것이 바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이다. 2006년 처음 시작한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TV에서만 보던 슈퍼스타들을 상대로 선전하며 4강에 올랐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연일 극적인 승리를 펼치며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이듬해에 벌어진 2009년 2회 WBC에서는 결승까지 올라 대한민국과 세계를 열광시켰다. 비록 결승전에서 연장 10회초 이치로에게 통한의 결승타를 맞으며 패하긴 했지만, 대회 내내 한수 위라고 여겨지던 일본과 미국, 도미니카 등을 상대로 명승부를 펼치며 많은 팬들을 야구장으로 유입했다.
한국 야구의 위상을 높였던 초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제대회의 선전 이후 외면 받던 프로야구는 서서히 활력이 되찾았다. 스포츠채널을 통해 KBO의 숙원이었던 전 경기 생중계가 시작되었고, 야구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위 ‘라이트 팬’들의 유입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특히 젊은 여성 팬들의 증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여성 팬들의 증가는 가족 단위 관람과 연인 혹은 친구들끼리의 관람으로 전환 되면서 야구장에서의 관람 문화와 소비 패턴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가족 단위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마케팅이나 연인을 대상으로 한 구단의 마케팅 변화는 과거 경기 내용에만 매몰되어 있던 야구 관람 문화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신축공사가 한창인 삼성 <라이온즈 파크> 과거 모습
이런 인기에 발맞추어 각 지자체에서 낡은 구장들을 개보수하거나 아예 신축하는 일이 늘어났다. 라이온즈파크, 챔피언스필드, 창원 NC파크 등이 메이저리그 급 구장으로 신축되었고, 인천 랜더스필드는 청라로 이전을 준비 중이며, 한화 이글스의 홈구장 역시 내년부터는 신축 구장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된다. 기존 구장을 쓰고 있는 나머지 구단들도 리모델링 등을 통해 더욱 안락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에 따라 중계진들을 위한 여건도 상당히 좋아졌는데, 과거 관중들 틈바구니에서 씨름했던 카메라 위치나 중계석 등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한참 야구장을 다니던 90년대의 야구장의 풍경은 야구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악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좁디좁은 좌석, 양 옆에서 품어져 나오는 담배연기와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의 욕설들, 먹을거리도 놀 거리도 없고 화장실이라도 한 번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하는 상황에 다시 오고 싶었을까? 아마 그 시절 야구 팬들에게는 야구장에 가고 싶어 아내나 여자 친구에게 다른 핑계를 대고 몰래 야구장에 왔던 경험이 다들 있으리라고 본다. 여성 팬이 급증한 요즘과는 아주 다른, 지나간 추억의 한 조각으로나 남아 있을 장면이다.
기아 <챔피언스 필드>와 광주 <무등 야구장>
구단들도 엄청나게 몰려드는 팬들을 위해 다양한 마케팅을 하고 있다. 유니폼도 여러 가지 디자인을 내놓고 있으며, 야구를 보면서 즐길 수 있는 먹거리들 개발에 아이디어를 쏟고 있다. 각 구단의 응원 역시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는데, 승패와 관계없이 모든 팬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문화가 되고 있다. 경기 종반이나 득점 찬스에 펼쳐지는 삼성의 <엘도라도>나 한화의 <육성 응원>, 상대를 삼진 잡았을 때 펼쳐지는 기아의 <삐끼삐끼> 등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화제다. 이런 응원 문화들이 SNS나 유튜브를 통해 퍼지면서 더 많은 챌린지를 낳고 있고, 젊은 팬들의 유입을 가속화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기아 응원단의 <삐끼삐끼>춤
프로야구의 암흑기 때에도 꾸준히 야구장을 찾았던 원조 골수팬들 입장에서는 야구장 티켓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인 지금이 서운하고 낯설다. 나만 알고 있던 맛 집이 TV에 방송 되어 원래 단골인 사람들이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나 할까. 모든 예매가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암흑기를 거쳐 온, 대부분 중년이 되었을 아저씨들의 예매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일단 손가락 놀림에서 도저히 젊은 세대들을 따라갈 수 없다.
이런 팬들의 대부분은 TV나 스마트폰으로 중계방송을 본다. 어쩌면 이런 사실이 중계방송을 더 전문적으로, 조금 더 수준 높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일, 6시30분에 약속도 잡지 않고 남은 일도 미루고 TV 앞에 앉아 야구를 보는, 삶의 최우선이 ‘야구’인 사람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지만, 공 하나에 열광하고 탄식하는 사람들, 응원하는 팀이 수십 년 동안 우승 근처에도 못가고 성적이 형편없어도, ‘오늘’ 승리하면 그렇게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 온 삶을 바쳐 그렇게 야구를 사랑했건만, 이제 야구장 티켓도 구하지 못해 서둘러 집에 오는 사람들, 그래도 맥주 한 캔과 치킨 한 마리 그리고 야구중계만 있으면 행복한
야구에 '미친'사람들.
나는 자주 후배 피디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우리는 이 '미친'사람들을 위해 중계방송의 품질과 전문성을 최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더 미쳐야 한다고. 사회에선 '그깟 공놀이'에 미친그들을 이상하게 볼지라도, 궁극적으로 우리 같은 스포츠 피디들을 먹여 살려주는 그 미친사람들을 우린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이 땅에서 야구팬으로 산다는 것은 참 고달픈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