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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친 PD Nov 05. 2024

고시엔의 모든 것(1)

고시엔의 역사와 의미

전 세계적으로 올여름은 정말 뜨거웠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열대야는 계속되었고, 숨이 턱턱 막혀오는 더위 때문에 전력 소비량이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이 여름, 이 기록적인 더위보다 더 뜨거운 소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의 고시엔 야구대회에서 한국계 재단인 <교토 국제고>가 우승했다는 소식. 우승 후 빡빡머리의 소년들이 한국어로 된 교가를 부르며 우는 모습에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최근 일본과 독도 문제를 비롯해 역사 문제까지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는 이때에, 일본 본토에서 울려 퍼지는 한국어 교가라니!

     

2024년 여름 고시엔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교토국제고

관중석에서도 <교토 국제고> 응원단들,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재일 한국인들, <교토 국제고>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교토 지역 고교생들과 지역 주민들까지 모두 울음바다였다. 고시엔 야구의 위상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깟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일인가 의문을 가질 것이다. 한 마디로 답하자면 맞다. 고시엔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일본 열도가 들썩일 만큼 대단한 일이고, 거기에 한국계 학교가 우승한 것은 정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인 것이다.

      

고시엔 제패에 열광하는 교토국제고 응원단

원래 전 일본 고교야구 선수권대회의 시작은 1915년 시작된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로 보는데, 이는 학제 개편 전으로 이후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로 재편된다.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의 일본은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 만주까지 점령하면서 대륙진출의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던 시기였고, 사회문화적으로는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사회 각 분야를 서구화하면서 개혁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또 식민지 수탈로 얻은 잉여 이익을 토대로 일본 경제가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는데,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욕구와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스포츠계도 각 종목의 전국 대회들이 신설되는 등 덩달아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일본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 입장식

이 시기 일본은 전국에 철도를 깔기 시작했는데, 이 공사를 맡은 한신 전기철도는 이 노선이 지나가는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철도역을 건설하면서 대규모 교외주택단지를 개발하게 된다. 이 마을이 완성된 것은 1924년. 그 해는 십간(十干,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과 십이지(十二支,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로는 갑자년(甲子年)이었다.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첫 글자인 甲과 子로 구성된 갑자년(甲子年)은 길조(吉兆)로 여겨졌고, 이 때문에 새로 건설한 교외주택단지의 이름을 갑자원(甲子園)이라고 불렀는데 이 갑자원(甲子園)의 일본식 발음이 바로 ‘고시엔’이다. 주택단지를 건설하면서 마을 중심부에 대운동장을 같이 지었는데 일본야구의 성지, 고시엔 야구장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고시엔(甲子園) 대운동장 입구의 표지판

1924년, 고시엔구장이 완공되고서 일본의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는 이곳으로 옮겨 진행된다. 역사적인 고시엔 야구대회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고시엔 야구대회로는 올해가 딱 100주년인 셈인데, 100주년을 기념한 올 해 여름 대회에서, 지난한 세월을 견디고 버텨온 교토 국제고가 우승을 차지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고시엔 구장 100주년 기념 신문광고

고시엔은 봄 고시엔과 여름 고시엔으로 나뉜다. 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하는 봄 고시엔은 전 해 추계대회 성적 우수팀 초청 형식으로 펼쳐지는 대회로 선발 고교야구대회인 셈이다. 아사히신문이 주최하는 여름 고시엔은 일본의 약 4000여 개의 일본 고등학교 야구부가 모두 출전하는 명실  상부한 최고 권위의 대회이다. 우리가 보통 ‘고시엔’이라고 하면 바로 이 여름 고시엔을 가리킨다. 일본의 고등학교 야구부가 모두 출전하기 때문에, 일본 열도가 들썩일 정도로 매우 인기가 높다. 봄 고시엔도 인기가 매우 높지만 여름 고시엔과는 비교 불가이다.  

     

한 여름의 고시엔 구장

일본의 고교야구 선수들의 꿈은 뭘까? 프로구단의 지명? 여름 고시엔 우승? 놀랍게도, 일본 고교야구 선수 대다수의 꿈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꿈은 바로 고시엔 야구장의 흙을 밟아 보는 것. 일본은 47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도쿄 도와 홋카이도에만 2장의 본선진출권을 주고 나머지 지역은 본선 진출권이 1장이기 때문에 지역 예선에서 우승을 해야만 고시엔 본선 무대를 밟을 수 있다. 따라서 예선부터 경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한 데, 워낙 많은 팀이 참가하다 보니 예선부터 본선까지 모두 토너먼트 형식이어서 단 한차례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는다. 패할 경우 그대로 탈락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예선을 거쳐 도쿄 도와 홋카이도에서 2팀씩, 나머지 45개 지역에서 1팀씩 약 4000여 개의 학교 중 오직 49개 학교만이 고시엔구장의 흙을 밟을 수 있다. 우승은커녕 고시엔구장의 흙을 밟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이렇기에 여름 고시엔은 단순히 고교야구대회가 아니라 일본 열도 전체의 축제이자 모든 고교생들의 청춘 드라마이며 꿈이다.

      

일본인들의 청춘 드라마, 고시엔 야구대회

특별활동에 진심인 일본은 4000여 개 고교 야구팀 중 대부분의 팀들이 특별활동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교 야구팀은 약 100개 정도인데, 모두 엘리트 선수들이 소속되어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일본 고교야구팀 중 우리와 같이 엘리트 선수들로 구성된 팀은 약 250여 개 정도로 추산되는데, 사실 엘리트 팀과 특별활동의 경계에 있는 팀들이 많아서 정확한 엘리트 팀의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심지어 엘리트 팀이라고 분류되는 팀에도 특별활동으로 뛰는 선수들이 같이 존재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선 고교야구대회가 열리든 말든 ‘남 일’에 가깝지만, 4000여 개 학교의 15만 명의 고등학교 선수들이 출전하는 일본의 여름 고시엔은 ‘남 일’이 아니다. 내 아들, 아니면 조카 혹은 사촌동생이나 학교 친구, 하다못해 친구 아들이나 옆집 아들이 출전하는 ‘우리 일’인 것이다.

    

관중이 가득 찬 고시엔 구장

따라서 고시엔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고교가 경기하는 날이면 그 지역 술집은 빈자리가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전 경기를 NHK를 통해 생중계하는데, 평균 시청률이 무려 20%에 이른다.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혹시 고시엔에서 우승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 지역의 공항이나 터미널은 환영인파로 마비가 되고 그 지역 상인들은 대규모 세일을 진행하기도 한다. 일본 열도가 2주일 동안 지독한 열병을 앓는다. 일본에서 ‘고시엔’이란 그런 의미이다.  

    

고시엔 야구 중계방송을 듣는 사람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일본의 고등학생은 누구나 원하면 야구부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지역 우승자리는 엘리트 선수들이 모여 있는 토인고교나 PL학원 같은 야구 명문고들이 주로 차지하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학교들이 고시엔 본선에 진출해서 좋은 성적이라도 거두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전력이 좋지 않은 팀이 온갖 무시와 시련을 이겨내고 극적으로 고시엔 본선에 진출해서 결국 여름 고시엔을 제패하는 것, 그것이 일본 야구 만화의 가장 흔한 스토리이다. 그 만화 같은 스토리를 올해 교토 국제고가 써 내려간 것이다.

      

환호하는 교토 국제고 선수들

여름 고시엔이 끝나면 대부분의 고3 야구 선수들은 학업으로 돌아간다.  야구선수로서의 삶은 여름 고시엔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 것이다. 이제  청춘의 한 페이지가 끝났다는 의미로 여름 고시엔이 끝나는 것을 ‘여름이 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학업으로 돌아간 선수들은 남은 기간 프로구단에 진출을 할지, 공부를 계속해 대학을 갈지,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결정을 한다. 상당한 수준의 선수들도 야구선수로의 삶을 택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야구를 놓지 않고 ‘사회인 야구’를 하게 된다.      


아시안게임이나 아마추어 국제대회에 나오는 일본대표팀은 이 ‘사회인야구’ 대표팀인 경우가 많다. 우리 대표팀이 일본의 이 ‘사회인야구’ 대표팀에게 고전을 하거나 간혹 지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나라 ‘사회인야구’ 수준을 생각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일본의 ‘사회인야구’ 수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그렇다고 프로야구 선수들이 주축인 우리나라 대표팀의 패배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일본 국가대표팀

이처럼 고등학교 때까지 고시엔대회만을 바라보며 야구를 했던 수준 높은 선수들은 프로 구단에 입단하지 않고 대학 진학을 하거나 사회에 진출한 경우에도 계속 야구를 놓지 않고 사회인 야구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일본 프로야구의 저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평생을 야구와 함께하는 일본 사람들의 열정이 일본 야구를 세계 최강으로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일본야구를 세계 최강으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고시엔’이다. 이런 고시엔을 한국계 학교인 <교토 국제고>가 어떻게 제패할 수 있었을까?

<2편에 계속>

고시엔구장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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