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해버지’ 박지성이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 소식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에이, 무슨 소리야. <아인트호벤>에 간 것도 대단한 건데, 프리미어리그라니, 그것도 맨유라니.’
당시 프리미어리그 중계권을 가지고 때문에 이 놀라운 소식에 회사 전체가 난리가 났던 기억이 있다.
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세계축구의 변방이었던 한국 축구. 2002년 월드컵에서 깜짝 4강에 진출하면서 세계무대로 비로소 눈을 돌린 한국 축구는 불과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유럽리그로 진출하는 선수들이 쏟아졌고, 몇몇 선수들은 빅리그의 최고 명문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바이에른 뮌헨>의 김민재와 <파리 생제르맹>의 이강인
유럽축구를 오래전부터 즐겨오던 팬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여러 더비 중에 가장 치열한 더비 중 하나로 <아스날>과 <토트넘>의 ‘북런던 더비’를 꼽을 수 있다. 이 ‘북런던 더비’는 원래도 손에 꼽힐 만큼 치열하고 인기 있는 더비지만국내에선 <토트넘>의 레전드가 된 손흥민의 인기로 인해가장 유명한 더비로 발돋움했다.
'북런던 더비' 중계방송 포스터
‘더비(Derby)'란 좁게는 같은 지역에 있는 경쟁 팀끼리의 대결을 의미하는데, ‘북런던 더비’ 뿐 아니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맨체스터 더비’, <리버풀>과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축구 역사가 계속되면서 이 의미는 점점 확대되어 전통적인 리그의 라이벌이나 역사적, 민족적으로 대립하는 지역 간의 치열한 경기도 ‘더비(Derby)'라고 부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더비인 스페인 라리가의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엘 클라시코’가 이에 해당한다.
‘더비(Derby)'라는 명칭을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사실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고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그 많은 ‘설’ 가운데 잉글랜드 중동부에 있는 ‘더비(Derby)’라는 소도시에서 기독교 사순절 기간에 <성 베드로> 팀과 <올 세인트> 팀이 매년 치열하게 축구 경기를 벌인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잉글랜드의 수도인 런던에는 아주 많은 팀이 있고 많은 팀이 라이벌 관계에 있지만, 유독 <아스날>과 <토트넘>, 이 두 팀은 왜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팀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토트넘> 로고의 원형이 된 기념 조형물
<토트넘 핫스퍼>는 1882년 바비 버클이라는 소년과 그 친구들에 의해 토트넘 지역에서 창단되었다. 이 남학생들은 할로우즈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로 크리켓 클럽의 회원들이었고 이 축구클럽은 겨울 동안 스포츠를 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이들은 할로우즈 교회의 성경 수업 선생님인 존 립셔에게 도움을 구했고 립셔는 클럽의 형성기 동안 소년들을 돕고 지원했으며, 본격적인 축구 클럽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1885년 <토트넘> 퍼스트 팀
<토트넘>이 창단한 지 4년 뒤인 1886년, 런던 남동부에 있는 울리치의 왕립 무기공장(Royal Arsenal, 로열 아스날)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축구 클럽을 만든다. 이 축구 클럽의 처음 이름은 <다이얼 스퀘어>. 그 후 몇 차례 이름이 바뀌었지만 무기공장 노동자의 정체성을 찾아 <아스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왕립 무기공장, <로열 아스날>
<아스날>과 <토트넘>이 ‘죽고 못 사는’ 라이벌 관계가 된 것은 역사가 깊다. 그 시작은 ‘헨리 노리스’라는 문제의 인물로부터였는데, 그는 당시 런던의 축구 클럽 <풀럼>의 회장이었다. 노리스는 재정위기에 있던 <아스날>을 인수하면서 <풀럼>과 합병하여 런던의 최강팀으로 재창단하겠다는 계획을 갖는다. 하지만, 런던의 명문 팀인 두 팀을 합병하겠다는 무리한 목표는 풋볼리그와 축구협회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무산된다. 합병이 좌절된 후 헨리 노리스는 런던 남동부 울리치에 있던 <아스날>을 북런던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킨다.
<아스날>의 팀명과 유니폼 변천사
<왕립 무기공장(Royal Arsenal, 로열 아스날)>이 있던 울리치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지역은 공장지대였기 때문에 거주민이 적었고, 따라서 <아스날>은 관중 수가 턱 없이 부족해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여 쉽게 이동할 수도 없고 광고나 마케팅 수익이 없이 관중 수익에만 의존해야 했던 그 시절에 인구가 적다는 것은 클럽을 운영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노리스는 주택이 밀집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북런던으로 전격 이전을 발표한 것이다.
3.8마일 거리의 양 팀 홈 스타디움
당연히 먼저 북런던에 자리 잡고 있던 <토트넘>은 이 결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스날>이 북런던으로 올 경우 지역의 팬덤을 나눠야 할 뿐 아니라 애초에 ‘교회 오빠’들로 구성된 <토트넘>과 ‘왕실 무기공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아스날>의 팀 컬러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13년, 2부 리그로 강등된 <아스날>은 <토트넘>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고지 이전을 강행한다. 새롭게 이전한 <아스날>의 홈 스타디움은 당시 <토트넘>의 홈 스타디움이었던 화이트 레인에서 불과 4마일(약 6.4km) 정도 떨어진 장소였다. 드디어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적대적 더비, ‘북런던 더비’가 시작된 것이다.
가장 적대적인 더비, '북런던 더비'
이렇게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북런던 더비’.양 팀의 팬들은 누가 진짜 북런던의 주인인지를 놓고 여전히 격돌하고 있다. <토트넘>의 팬들은 원래 이 지역의 주인은 <토트넘>이며, <아스날>이야말로 오로지 재정문제 때문에원래 연고지를 버리고 북런던으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강도’들이라고 폄훼한다. 게다가 ‘교회 오빠’들이 만든 ‘고상한’ <토트넘>만이 우아하고 격식 있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조용한 주택지구인 북런던을 대표할 수 있지 ‘무기공장 노동자’들의 팀인 <아스날>은 북런던을 대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스날> 팬들의 주장은 다르다. <아스날>이 연고지를 이전한 1913년, 홈구장이 있는 하이버리 지역은 ‘1899년 런던 정부법’에 따라 이미 런던에 편입된 상태였다. 이 ‘1899년 런던 정부법’에 따라 시행된 법에서 하이버리를 포함하여 첼시, 풀럼 등의 지역은 모두 런던에 편입되었지만 토트넘 지역은 런던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토트넘 지역은 행정구역상 런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서울 북부로 예를 들면, <아스날>은 구파발에 홈구장이 있고, <토트넘>은 삼송이나 지축에 홈구장이 있었던 것이다.
토트넘 지역이 런던으로 편입된 것은 <아스날>이 북런던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지 50년도 넘게 지난 1965년이다. "1963년 런던 정부법"에 따라 런던이 ‘그레이트 런던’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된 이후부터 토트넘 등 몇 개 지역이 런던으로 편입되었다. 이를 근거로 <아스날> 팬들은 <토트넘>이 이곳에 먼저 들어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토트넘>은 런던 팀이 아니었으며 <아스날>보다 반세기나 늦게 런던 팀이 되었기 때문에 ‘북런던’의 진짜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965년에서야 런던으로 편입된 토트넘 지역
이런 팬들의 논쟁이나 대립은 같은 지역을 연고로 하는 팀들 간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 프로야구만 해도 ‘잠실’의 주인 자리를 놓고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팬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러나 두 팀의 적대의식은 이렇게 일반적인 라이벌관계를 훨씬 뛰어넘는다.
'북런던 더비', 양팀 팬들의 충돌
‘북런던 더비’가 펼쳐지는 날, <토트넘>의 홈구장에 가 본 적이 있다. 경기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티켓을 구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북런던 더비’의 열기라도 느껴보자는 생각으로 전철을 타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전철이 하이버리를 지날 때 <토트넘> 유니폼을 입은 몇몇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하이버리는 당시 <아스날>의 홈구장이 있는 곳이었는데, <토트넘> 팬들은 그곳을 쳐다보기도 싫었던 것이다. 당시 <토트넘>의 홈구장이었던 <화이트하트레인 스타디움> 앞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토트넘> 팬들은 경기장을 에워싸고 반대편에서 깃발을 들고 응원가를 부르며 걸어오고 있는 <아스날> 팬들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중세시대의 공성전을 연상시켰다. 수성해야 할 쪽은 홈이었던 <토트넘>이었고, 성을 함락시켜야 할 쪽은 <아스날>이었다. 가운데에는 엄청난 병력의 기마경찰들이 있었는데, 양 응원단이 가까워지자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기마경찰들은 양 응원단을 떼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북런던 더비', 양 팀 팬들의 충돌을 다룬 동영상 캡쳐
이 광경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격돌하는 것일까. 이 두 팀이 단순한 지역 라이벌을 넘어 ‘철천지 원수’가 되어 버린 데에는 몇 번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