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 언급한 대로 모든 일본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의 꿈은 고시엔구장의 흙을 밟아 보는 것, 즉 고시엔 본선 진출이다. 전 경기가 토너먼트로 진행되기 때문에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그대로 탈락하게 되는데, 어렵사리 본선에 진출했지만 한 경기 패배로 탈락의 아픔을 맛보는 팀은 아쉬움에 눈물바다가 된다.
고시엔 대회는 경기 시작 전 양교 선수들이 도열해 양교의 교가를 부른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승리 팀은 홈 플레이트 앞에 도열해 교가를 다시 부르고 패배 팀은 자기 팀 더그아웃 앞에 도열해 상대 팀의 교가를 듣는다. 이때 패한 팀의 선수들은 대부분 눈물을 훔치는 데 이 모습을 본 패배 팀의 응원단들도 같이 울음을 터뜨리는 게 고시엔의 흔한 풍경이다.
승리 후 교가를 부르는 <교토국제고> 선수들
경기 내내 전력을 다해 플레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청자라면 특별히 어떤 고교를 응원하지 않더라도 경기에 패배한 후 우는 모습에 같이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패배에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 야구대회에선 사실 결승전 정도를 제외하고는 패배 팀이 눈물을 훔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고교 선수들은 이미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서 치러야 할 수많은 경기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패배한 팀은 선수들도, 응원단도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일본 고교야구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본선 진출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에 고시엔구장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며 특히 3학년 학생들은 이 여름 고시엔을 끝으로 야구부에서 나와 학업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어쩌면 마지막 경기 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절박함은 경기에서는 사력을 다하는 플레이로, 패배 후에는 아쉬움의 눈물로 분출된다.
고시엔 구장의 흙을 담고 있는 모습
고시엔 경기를 챙겨보는 야구팬들은(아사히신문에서 무료 스트리밍을 하고 있다.) 패배 팀 학생들이 울면서 고시엔구장의 흙을 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아주 오래된 고시엔 대회의 전통이다.
1946년 고시엔대회에서 처음으로 준결승에 진출한 도쿄고등사범부속고가 나니와상고에게 패한 후 선수들이 더그아웃 앞에서 울고 있었는데 감독이 ‘여기서 이렇게 울고만 있지 말고 가서 흙을 퍼 가지고 와라. 내년에 다시 돌려주러 오자’고 이야기했던 것이 이런 전통을 만들었다고 한다.
패배한 팀의 전통이 된 고시엔 구장의 흙 담기
내년에 흙을 다시 돌려주러 오자는 얘기는 열심히 노력해서 고시엔 본선에 다시 진출하자는 의미이기 때문에, 새롭게 의지를 다지면서 패배 팀들은 열심히 흙을 담아간다. 그 이유로 경기 종반 패배가 유력한 팀의 더그아웃 앞에는 사진기자와 카메라기자의 자리 잡기 경쟁도 무척이나 치열하다.
최고급 토사로 이루어진 고시엔구장의 내야
이 고시엔구장은 사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최대 라이벌이자 NPB 최고 인기 팀 중에 하나인 한신 타이거즈의 홈구장이다. 오승환선수의 경기를 즐겨 보셨던 팬들은 새까만 흙으로 되어 있는 고시엔구장의 내야를 기억할 것이다. 고시엔구장의 내야는 불규칙 바운드를 최소화한 최고급 토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8월에 2주간 고시엔 대회를 위해 구장을 빌려주고 나면 이렇게 퍼간 흙 때문에 정비를 새로 해야 한다. 한신 구단은 최상의 경기장 컨디션을 위해 고시엔구장의 흙을 관리하는 회사까지 별도로 설립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구단 입장에서는 해마다 흙을 보충하느라 많은 비용을 지출하지만, 일본 청춘들의 꿈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부담한다.
2024년, 여름 고시엔대회에서의 교토국제고의 기적은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엄청난 화제를 낳았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배 이후인 1947년,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의 교육을 위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교토조선중학교’를 설립한 것이 교토 국제고의 시작이다. 1958년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아 한국에서는 정식 고등학교가 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인가를 받지 못하고 극심한 차별에 시달렸다. 지금 교토국제고가 있는 곳도 주민들의 노골적인 반대를 뚫고 어렵사리 자리 잡은 곳이다.
<교토국제학원>의 정문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본 국적을 선택하는 교포들이 많아지고 또 한국계임을내세우기에는 차별도 극심했기 때문에 교토조선고등학교에 지원하는 학생 수가 날로 줄어들어 폐교 위기에 까지 몰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99년 야구단을 창단하게 된다. 교토 지역에서 야구를 계속하고 싶지만 인원초과로 야구부에 못 들어간 학생들이 야구를 하기 위해 교토조선고등학교로 들어오면서 학교는 다시금 활력을 찾았다.
드디어 2003년, 학교를 <교토국제중·고등학교>로 바꾸고 일본에서도 정식 학교 인가를 받아 한국과 일본 모두 정식 인가학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순수 일본인 학생들의 입학이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한국어·영어·일본어·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 교육과 문화교육을 실시하면서 국제고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학생 비율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일본 학생 비율이 약 70%가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일본 학생들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처음 학교설립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한국어로 된 교가를 고수하고 있다. 이번 고시엔대회에서 당당하게 한국어로 교가를 부르면서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 명장면은 이런 학교재단의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교토국제학원>의 교사
일본 정부의 인가는 받았지만 여전히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어서 <교토국제고>는 사실 야구부를 운영할 만한 형편은 아니다. 연습구를 살 돈이 없어 공에 테이프를 칭칭 감아 훈련했던 일화는 유명한데 시즌 초 기아 타이거즈의 심재학 단장이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연습구 1000개를 지원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운동장도 왼쪽이 70미터, 오른쪽이 60미터밖에 안되어 외야 수비 훈련이나 타격 훈련이 곤란한 지경이다. 이런 환경에서 불굴의 의지로 고시엔을 제패한,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야구 훈련하기에 턱없이 좁은 운동장
고시엔 우승 후 홈 플레이트 앞에 도열한 빡빡머리의 <교토국제고> 학생들이 한국어로 된 교가를 부를 때, 관중석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교토국제고 재학생들은 물론이고 68년 만에 고시엔 우승을 가져온 교토의 지역주민들은 승리와 환희의 눈물을 흘렸고, 일본 전국 각지에서 <교토국제고>를 응원하기 위해 몰려든 ‘재일한국인’들은 지난 세월의 한을 눈물로 쏟아 버렸다.
우승 후 응원단에 인사하는 <교토국제고> 선수들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로 시작되는 <교토국제고>의 교가는 NHK를 통해서 일본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동해냐 일본해냐 지금도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는 시기에 일본인들의 청춘드라마인 여름 고시엔에서 NHK를 통해 ‘동해’ 바다가 울려 퍼지다니, <교토국제고>가 이룬 것은 단순히 고시엔 우승만은 아니었다.
열광하는 <교토국제고> 응원단
가사에 있는 ‘야마토 땅’은 또 어딘가. 지금 교토와 오사카 지역을 아우르는, 백제와 가야 연맹체가 한반도의 문화를 직접 전해주었다는 그 땅이 아닌가. 자기들이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다스렸다고 주장하는 일본에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라고 당당히 선포한 것이다.
한국 국명을 딴 지역들
이런 파급력 때문인지 NHK는 ‘동해’ 바다를 일본어 자막으로는 ‘동쪽의 바다’로 번역해서 방송했다. ‘동해’라는 고유 명사를 도저히 송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시엔 우승 후 극우 세력들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2021년 4강에 진출했을 때보다는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정치인들까지 나서 ‘고시엔은 국제대회가 아니다. 왜 조선학교가 고시엔에 참가하느냐’고 노골적으로 혐한을 부추겼다. 이 때문인지, 꿈에 그리던 여름 고시엔을 제패하고도 주변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우승의 기쁨을 맘 놓고 표현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동해'바다를 '동쪽의'바다로 번역한 NHK 방송 화면
급기야 교토 지사와 지역주민들은 '<교토국제고>는 조선학교가 아니라 국제학교다. 최선을 다했던 우리 아이들의 순수한 꿈을 꺾지 말라'는 기자회견까지 열며 사태를 수습하고 있다. 이런 과정속에서 <교토국제고>의 우승에 마음이 불편했던 일부 일본인들도 마음을 돌려 이제 <교토국제고>는 교토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학교가 되었고,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유명 학교가 되었다. 일본 중학생들이 서로 입학을 원하고 있고, 야구부에도 지원이 넘쳐난다고 한다. 최근 K-POP이나 K-드라마의 인기로 인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일본의 청소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도 <교토국제고>의 인기에 주요 요인이다.
<교토국제고> 학생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일본인들의 청춘 드라마인 여름 고시엔을 제패한 <교토국제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한국학교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한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은 우리 가슴속에 커다란 감동으로 남았다. <교토국제고>가 이뤄낸 성과는 과거사와 관련하여 답답한 공방만 주고받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