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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방보감 Nov 04. 2024

7보병사단(칠성부대)

상승칠성 인화단결

제7보병사단은 대한민국 육군의 전설적인 부대 중 하나로, 총 18회의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하며 '메이커 사단'이라는 별명을 얻은 부대입니다.


이 부대는 '싸우면 항상 이긴다'는 의미를 담은 '상승칠성부대'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특히 그 강력한 전투력과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7사단은 현재 휴전선 중부 전선의 경계를 담당하고 있으며, 2군단 예하 부대로서 철원에서 화천까지 이어지는 GOP 경계작전을 수행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1949년 1월 7일 제7여단으로 창설된 이후, 같은 해 2월 1일 수도여단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후 1949년 5월 12일, (구)수도사단으로 승격되었으며, 1949년 6월 20일에는 이준식 대령을 초대 사단장으로 하여 제1연대, 제9연대, 제19연대를 근간으로 정식 창설되었습니다.


창설 초기에는 후방에서 빨치산 소탕전을 벌이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동두천과 포천 지역의 경계임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이후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었고,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 중인 제2사단 제25연대가 7사단에 예속되었으나, 병영 문제로 인해 예정된 6월 15일까지 의정부로 이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은 동두천 전투와 포천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북한군의 압도적인 전력과 7사단의 예비대 부족으로 인해 동두천에 배치된 제1연대와 포천에 배치된 제9연대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특히 북한군의 주력 병력이 동두천과 포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북한군이 보유한 전체 전차 240대 중 150대가 7사단 방어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전차 방어무기가 부족한 상황에서 전력 손실이 크게 발생하였습니다.


이후 한강 방어선 전투 과정에서 7사단의 전력은 1/3 수준으로 감소하게 되며, 결국 병력과 장비를 다른 부대에 넘기고 1950년 7월 5일 해산됩니다.


해산 후 남아 있던 병력을 기반으로 전주에서 학도의용군과 지원병을 모집하여 재편되었으며, 이후 낙동강 전선의 안강-기계 전투가 벌어지던 8월 20일 대구에서 제3연대, 제5연대, 제8연대로 재창설되었습니다.


7사단은 영천 신녕 전투에서 제1군단 예비사단으로서 제6사단과 제8사단에 예하 연대를 보내어 지원하였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상황이 역전되면서 8사단과 함께 잔적을 소탕하며 북진하였습니다.


7사단은 평양 탈환작전에서 제1사단과 선두를 다투며 평양을 점령하였고, 현재도 양 사단은 각각 자신들이 평양을 최선두로 입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후 7사단은 강원도 양구에서 고지전을 반복하며, 425고지와 406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백암산, 적근산, 삼천봉 등을 포함한 지역에서 군사분계선을 38km 정도 북상시켜, 철원 김화군 일부와 화천댐을 대한민국 영토로 확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전협정 과정에서 군사분계선이 고지 한가운데를 관통하게 되어,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전 이후, 7사단은 중동부 전선을 담당하면서 현재까지 GOP 경계작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7사단의 GOP 작전 및 근무 환경은 국내에서 가장 험지 중 하나로, 특히 8여단 우선에서 제21사단 좌선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극도로 험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7사단의 작전 구역은 절벽과 다름없는 산비탈과 계곡을 포함하고 있어,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매우 어려운 작전 환경을 자랑합니다.


7사단은 155마일에 이르는 휴전선 경계부대 중 가장 좁은 방어 정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가장 험준하고 중요한 축선에 부대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1967년 4월 12일에는 7사단 관할의 DMZ 남방에서 40~60명 규모의 북한군 침투 병력과 2시간 가까이 교전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백발 규모의 포격이 동반되었습니다.


현재 7사단은 주둔지 대부분이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해 있지만, 전방의 GOP 여단들은 김화군 금성 지역의 3개 면에 상당수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북두칠성 : 우주를 다스리는 별, 동이족의 나라를 다스리는 별로 어떠한 적군도 격파한다는 의미

파란 원 : 평화로운 우주를 상징

본부근무대

제1전차대대

수색대대

공병대대

정보대대

군수지원대대

보급수송대대

정보통신대대

군사경찰대대

의무대대

화생방대대

방공중대

보충중대

여단본부대

제1보병대대 - 진격대대

제2보병대대 - 사자대대

제3보병대대 - 신병교육대

군수지원대대


1946년 2월 26일 전북 익산에서 창설되었으며, 1950년 1월 25일 경기도 동북부를 담당한 (구)수도사단 예비대로 예속된 뒤에 하필이면 전쟁이 벌어진 6월 25일에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석되어 떠나버렸고.


(구)수도사단은 가뜩이나 극심한 전력의 격차가 더 벌어지며 비참하게 밀려나게 됩니다.


그후 한강 방어선에서 혼성 제2사단에 예속되어 활동하다 낙동강까지 밀려나 영천 전투가 벌어지던 8월 20일 재창설된 7사단에 다시 예속된 뒤 전쟁 중후반부터는 사단의 주력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근무 환경이 짐승 같은 체력을 요구하는 곳으로, GOP에 일절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서 온갖 훈련과 교육훈련장 관리만 하게 됩니다.


자대 전입부터 전역할 때까지 자잘한 것을 합쳐 약 30여개 이상의 훈련을 뛰게 됩니다.

여단본부대

제1보병대대 - 진격대대

제2보병대대 - 북극성대대(GOP 전담부대)

제3보병대대 - 백랑대대

군수지원대대


남조선국방경비대 연대들이 창설될 당시에 두 번째로 창설된 연대이며, 1948년 여수 순천 10.19 사건 당시 투입되었던 부대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는 2사단 소속이었는데.


채병덕의 삽질로 여러 부대들이 의정부, 포천 방면으로 축차 투입되어 갈려나갈 때마다 5연대도 포천에서 갈리는 3연대를 지원하러 갔다가 마찬가지로 전멸 당하고 분산후퇴하게 됩니다.


이후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우면산 방면을 맡지만, 직후 2사단이 해체될 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보면 5연대도 괴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후 영천 신녕전투가 벌어질 즈음에 재창설된 7사단에 예속되게 됩니다.


이곳의 별칭은 군견도 낙오하는 곳으로, 소초를 중심으로 M, V, W형으로 만들어진 돌계단을 계속 오르락 내리락하는 GOP 지형 때문에 붙은 별명입니다.


8여단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전망대 소초를 제외하면 다들 한두곳 이상 크고 작은 급경사를 끼고 있습니다.


칠성전망대 맞은 편 산 정상의 소초는 매일 꼭대기 소초에서 산 밑으로 내려간 뒤 다시 산꼭대기 소초로 올라가야 하는 경악스러운 섹터 동선을 자랑합니다.


또한 GOP 부대 중 군사분계선에 가장 가까운 소초를 가지고 있으며, 모 소초의 대공초소에선 육안으로도 적 GP가 보이는 수준입니다.


여기 여단은 별로 힘든 게 없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GOP 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80, 90년대에 지어진 시설들을 거진 계속 쓰고 있었습니다.

여단본부대

제1보병대대 - 진북대대

제2보병대대 - 멸공대대(GOP 전담부대)

제3보병대대 - 통일대대

군수지원대대


1946년 4월 1일 강원도 춘천에서 창설되었고, 제6사단의 전신인 4여단 창설 때 근간연대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변경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수경사가 수도사단으로 재창설 되고부턴 그 예하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 후 한강 방어선에 투입되어 공방전을 치르게 되며, 청주 전투에서는 삽과 곡괭이, 대검으로 진지공사를 할 정도로 열악했으나, 영천 전투 즈음 7사단으로 예속된 뒤 평양 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됩니다.


전쟁 중후반부터는 사단의 주력으로 취급되면서 피의 능선 전투를 간접적으로 지원하기도 했으며, 백석산 전투에서는 주공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근무 환경은 신조차 버린 땅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전생에 일곱 가지 죄를 지으면 7사단으로 끌려가고, 여기에 악질적인 대죄 하나를 더 저지르면 8여단에 버려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휴전선 155마일 중에서 북한강 자락, 평화의 댐 상류 지역을 담당합니다. 문제는 일대를 흐르는 유량이 많아 산사태가 수시로 일어나며 침식 작용이 가장 활발합니다.


전군 GOP 섹터 중 최고로 험준하고 가파르며, 21시단의 섹터 길이 난이도와 자웅을 겨룰 정도입니다.


5여단에서 8여단 사이의 접경 지역은 신조차도 버릴 것 같은 땅이라 하는데, 8여단은 이미 버린 땅이라 알 바 없고, 접경 지역은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평균 30~40도의 가파른 산비탈과 계곡들로 이루어져 있어 상당히 가파릅니다. 배우 원빈님도 이 여단에 배치된지 몇달만에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의병 제대를 했습니다.


특히 8여단 내에서도 경사 60~70도로 악명 높은 마의 네발 계단이 있는 소초는 두 발로 오르기 힘들어 네 발로 기어 올라간다는 계단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심지어 초소별 순환을 제 시간에 완수하려면 속보로 다녀야 하기에 다리에 무리가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OP로 가는 도로도 정신나갈 정도의 급경사와 회전각을 자랑해서 운전병들이 가장 고난이라 평가하는 부대이며, 군 표준 차량들은 전륜구동을 넣어야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상상 이상으로 험악합니다.


제설작전도 급경사와의 전쟁이며, 가파른 보급로에 쌓인 눈을 길 밖으로 적당히 수준이 아니라 아주 깨끗하게 제설해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차량들이 잔여 눈들로 생긴 얼음 때문에 오르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해당 소초는 단절된 고립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단본부대

제16포병대대 - 충무대대

제57포병대대 - 화랑대대

제239포병대대

제251포병대대


강원도 화천군 일대에서 화력 지원을 담당하고 있으며, 1949년 6월 20일 제7사단 창설 때 대대 규모로 창설되었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105mm 3개 대대와 155mm 1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후 현재는 여단 예하의 4개 포병대대가 전부 자주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1대 이준식 소장

2대 유재홍 장관

3대 민기식 총장

4대 신상철 소장

5대 김형일 중장

6대 김용배 대장

7대 이성가 중장

8대 임충식 장관

9대 김용배 대장

10대 이성가 중장

11대 김익열 중장

12대 박정희 대통령

13대 하갑정 소장

14대 손희선 소장

15대 노재현 장관

16대 고광도 중장

17대 정승화 총장

18대 정봉욱 소장

19대 백남태 소장

20대 이재전 중장

21대 김용금 중장

22대 하소곤 소장

23대 김해창 소장

24대 노무식 소장

25대 배병노 소장

26대 민태구 소장

27대 정만길 중장

28대 민병선 소장

29대 김진선 대장

30대 정연우 소장

31대 임종섭 소장

32대 이남신 의장

33대 김종환 의장

34대 권영기 대장

35대 박흥렬 총장

36대 김홍영 소장

37대 김용기 소장

38대 한홍전 중장

39대 최종일 중장

40대 이상현 소장

41대 원홍규 소장

42대 구홍모 중장

43대 서정열 소장

44대 김종철 소장

45대 박원호 소장

46대 손광제 소장

현재 7사단은 대한민국 국군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중동부 전선을 담당하며, 철원에서 화천까지 이어지는 GOP 작전과 함께, 국토 방위를 위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사단은 창설 이후 수많은 전투와 작전을 통해 얻은 전투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7사단의 부대원들은 고된 훈련과 극한의 근무 환경 속에서도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바탕으로 국토 방위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7사단의 부대원들은 '상승칠성'이라는 부대명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승리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 국군의 중요한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7사단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최전선에서 헌신과 희생을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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