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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ve Nov 09. 2024

잡음이 들리는 아이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다리 사이로 파묻었다. 내 다리를 양 손으로 껴안고 눈을 감았다. 편하다. 갑자기 주변 모든 소리가 뚝 끊겼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전부 다. 마치 세상이 정지한 듯이 말이다.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어떤 한 사람의 희미한 말소리뿐이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무릎을 감싼 손을 뗐다. 천천히 일어나자 온기가 사라진 몸에는 한기가 몰려왔다. 다시 몸을 웅크리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전부 다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딱히 놀라지도 않는 일이다. 워낙 자주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이로 다른 소리가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 말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확실치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앞으로 쭉 나아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에서 서로를 보며 웃는 사람들의 말은 서로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허공에 떠서 머물렀다.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싸우던 사람들에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진심도 아닌 그런 말들은 듣고 싶지도 않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이렇게 볼 때면 생소하다. 말소리가 들릴 때는 그 사나운 소리에만 집중했는데 소리가 없어지면, 말을 하는 그 얼굴의 표정을 더 보게 된다. 밝게 웃는 사람들, 눈물을 가리려 애쓰며 우는 사람들. 가끔은 그게 부럽기도 하고 시간이 다시 움직일까도 싶어 그 사람들을 따라해 봤다. 웃길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공간이지만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다든지, 슬프지도 않은데 소리 내서 울어 본다든지.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그저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었다. 행동만 있지 감정이나 진심 따위는 담겨있지 않았다.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가끔 땅을 내려다보았고 가끔은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골목은 오랜만이다. 이렇게 조용한 풍경을 볼 때면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다가도 사람 소리가 그리워지곤 한다. 막상 사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면 지금의 순간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세상에 내 발소리와 숨소리만 들리는 이 순간이. 

 말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넓은 공터엔 한 아이만이 멀뚱히 서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슴이 먹먹하다. 이 넓은 세상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조용하다. 정적을 깰 무언가가 필요하다. 목을 가다듬어 봤지만 내 목소리도 같이 멈추었다. 입에서 나오는 건 내 목소리가 아닌 힘없는 공기소리일 뿐이었다. 나마저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은 것일까. 


 환상에서 깨어나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머리를 윙윙대며 두드렸다. 


 수없이 오가는 말들이 귓가를 울렸다. 약간의 진실이 첨가되어 있지만 결국엔 거짓으로 이루어진 말들이다. 그런 말들에도 의미가 있는 걸까 싶다. 차라리 그럴 바엔 조금 더 아프더라도, 조금 더 힘든 말이더라도 진실을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진실이 아닌 말을 들으면 저절로 머리가 아프고 그 말들이 희미해진다. 지금껏 내게 진실을 얘기한 사람은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나에게는 그저 잡음으로 들린다. 요즘 들어서 더 사람들의 말에 반응하는 게 버거워졌다. 사람들도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사람들의 말이 전부 다 거짓인 걸 알면서도 반응해주고, 내가 원치 않는 반응을 하고 있는데도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이 힘들다. 어떻게 하면 그들과 같아질 수 있을까. 거짓을 말하며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가슴이 답답해져 운동장으로 나왔다. 학교 운동장으로 나오자 역시나 수만가지의 잡음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울 때는 오히려 조용해진다고 했던가? 갑자기 딱 그 말처럼 주변이 온통 고요해지고 오직 하나의 소리만 들렸다. 익숙한 그 말소리가. 


 뛰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고 있었기에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나에게로 집중되었겠지만 이래든 저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에게는 지금 그 아이들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직, 그 말의 주인을 찾고 싶었다. 처음으로 잡음이 들리지 않은 말이었다. 처음으로 불편하지 않은 말이었다. 한참을 더 뛰어서 그 말의 주인을 찾아냈다. 나와 같은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내가 그 아이를 쳐다보듯이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같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도 나처럼 잡음이 들릴 수도 있겠다는. 


 어쩌면... 내 인생의 처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고 그 아이의 명랑한 인사가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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