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우야. 나 고민이 생겼어.”
경은이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공원에 조용한 벤치였다. 나는 읽던 책을 덮어놓고 경은이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어떡하지?”
나는 놀란 눈으로 경은이를 바라보았다. 누굴 좋아할 것처럼 생긴 아이는 아닌 듯 했는데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랑이 찾아오나 보다.
“누군데? 내가 아는 애야?”
“음.. 너가 아는 애야.”
나는 머릿속으로 내 주변의 남자아이들을 떠올려 보았다. 생각에 잠긴 나를 보는 경은이의 표정은 어쩐지 별로 밝아 보이지 않았다. 경은이는 초조한 듯 자꾸만 손끝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쳤다. 하늘은 푸르렀고 그에 비해 경은이의 얼굴은 발갰다.
“그러면 너는 그 애가 매일 좋아? 막 뭘 해도 멋있어 보이고?”
그러자 경은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당연히 아니지!”
라는 말을 했다. 경은의 답은 나에게는 뜻밖이었다.
“왜?”
나는 경은에게 다시 물었다.
“음.. 그 애가 좋기는 한데 가끔씩 눈치 없이 내 말 못 알아듣거나 그러면 싫기도 하지?”
경은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나는 헷갈림에 얼굴을 찡그리며
“그러면 좋아하는게 아닌 거 아니야?”
하고 물었다.
“나는 그 애를 좋아해. 왜냐하면 가끔씩 미운 면이 있어도 그 애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어딘가로 가는 건 아니잖아? 사람이 어떻게 맨날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겠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는 마음이 여러 가지인 거지. 나는 그래서 누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모든 면을 그렇게 본다고 생각하는 게 싫어.”
당차게 대답하는 경은이의 모습을 보며 나한테 하는 말을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고백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다시 되새겨보았을 때 사람에게는 하나의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면이 있을 텐데 그 중에서도 좋은 면만 계속 보려 하는 아이들이 대단하면서도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경은이는 상대의 나쁜 면도, 좋은 면도 다 받아들일 것 같다. 그런데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나쁜 면을 보고도 좋아할 수 있다는 건 나로서는 쉽게 하지 못할 일 같다.
“그러면 너는 그 애랑 사귀고 싶어?”
내가 다시 경은이에게 물었다.
“응! 당연하지.”
경은이가 세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고백하면 차일수도 있잖아. 그리고 어차피 지금 사귀면 나중에 가면 다 헤어지지 않을까?”
“고백하고 차이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너는 그러면 친구가 친구 안 해줄 걸 걱정하고 친구하자고 해? 아니잖아. 물론 걱정은 되지만 도전이라도 해보는 거지. 그리고 헤어질 건 당연히 알고 사귀는 거지! 내가 생각하기에 헤어짐이야말로 세상에서 2번째로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아.”
이런 당찬 포부는 세상에서 처음 들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느껴졌다. 헤어질 것을 알고 사귄다.
“근데 헤어질 걸 알고 사귀면 오히려 슬프지 않아?”
“난 오히려 안 슬프던데? 얘가 나를 언젠가 떠나갈 걸 아니까 떠날 때 붙잡지 않고서 잘 보내줄 수 있더라고. 그렇다고 맨날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당연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는 것 뿐이지. 그러면 내가 누군가를 떠날 때도 잘 떠날 수 있고 말이야. 그래서 만남이 딱히 두렵지 않더라고. 내가 자유롭게 떠날 수 있고, 얘도 날 떠날 수 있으니까.”
헤어짐을 알면서 사람을 만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곧 전학을 갈 친구가 새로 친구를 사귀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람을 자유롭게 만나게 된다면 내 삶은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근데, 아까 2번째로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잖아. 그러면 첫 번째는 뭐야?“
“첫 번째는 만남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만남이 있어야 헤어짐이 있는 거잖아. 근데 나는 반대로 헤어짐이 있어야 만남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왜? 만남에 헤어짐이 꼭 필요한 걸까?”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론 딱 정확히 정해져 있지는 않겠지만 사람이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만나는 것들이 없어지고 비로소 객관적으로 내 주변을 둘러볼 수 있을 때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경은이의 답변을 듣자 비로소 퍼즐이 조금 맞춰지는 듯 했다.
“너는 너의 가치관이 딱 제대로 서 있는 것 같아. 부럽다. 누군진 몰라도 네가 좋아하는 애는 좋을 것 같아.”
“진짜?”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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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귈래?”
경은이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볼은 새빨게져 있었고, 두 손은 덜덜 떨고 있었지만 두 눈만은 진심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경은이가 해준 말들이 너무 고마워서, 나를 바라봐준 진심이 너무 기뻐서 같이 눈을 맞춘 채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