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유재 Sep 06. 2024

초로의 남자와 자리를 양보한 여자

9월 6일 출근길

  늦은 새벽에 비가 왔었나 보다. 길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찌르르르르 찌르르르르.”

  “쯔으으 쯔으으.”

  “찌르르릉르르 찌르르릉르르.”

  걸음을 걸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소리들이 끊겼다. 이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찌르찌르찌르찌르.”

  “쯔으으 쯔으으 쯔으으.”

  “찌르르르르 찌르르르르.”

  풀벌레 소리는 사거리에서 끊겼다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짧은 보도 옆에서도 계속 들렸다. 보도 옆으로 놀이공원이 있고 경계에는 메마른 풀들이 자라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마다 자기 자리를 잡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버스가 줄지어 왔다. OOO번 버스로 예닐곱 명이 모여들었다. 뒷부분의 자리는 순차적으로 차서 맨 뒷자리에 하나, 바퀴 때문에 높은 자리 하나, 첫 번째 이인좌석 창 쪽에 하나, 세 자리가 비어 있었다. 첫 번째 이인좌석 통로 쪽에는 얼굴이나 체격이나 건장해 보이는 20대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앉으려는 몸짓을 하자 젊은이는 고맙게도 창 쪽으로 옮겨 주었다. 편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바로 앞은 교통약자석인데 자리에 어울리게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헌팅모자를 썼고 모자 둘레로 흰 머리칼이 비죽비죽 나와 있었다. 처진 볼 살에 검버섯이 보였고 눈꼬리와 귓 살에는 잔주름이 있었다. 그래도 어깨는 펴졌고 자세는 꼿꼿했다.

  내 뒤로 버스에 오른 한 젊은 여자가 그 교통약자석 앞에 섰다. 앳되어 보이는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얼굴이며 체형이며 작고 아담했다. 등에는 두툼하고 각진 등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머리칼이 가방을 덮고 있었다. 밝은 색의 반팔 상의와 체육복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오른손에는 에코백을 들고 있었다. 에코백은 울퉁불퉁 부피가 있고 무거워 끈조차 팽팽하게 긴장되어 보였다.

  교통약자석 앞에 서며 여자는 에코백을 왼쪽 팔뚝에 걸려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버스가 출발하려고 움직였고 여자는 미처 자리를 못 잡고는 경직된 몸동작으로 발을 잽싸게 움직였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버스손잡이를 잡았다. 몸이 휘청거렸다. 오른팔목은 가느다랗고 곱창 머리 끈이 끼워져 있었다. 허리 쪽에 둔 왼쪽 팔뚝은 에코백의 무게로 살이 깊게 눌려 보였다.

  ‘무겁겠는데…, 받아줘야 하나…?’ 이어서,

  ‘이제 그런 거는 없지, 웬 참견…’이라고 생각했다.

  노인도 신경이 쓰이는지 아니면 내릴 때가 되어서인지 힐끔힐끔거리고 있었다.


  다음 정거장에서 노인이 내렸다. 젊은 여자가 그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그 자리 앞으로 ‘남자 젊은 노인’이 섰다. 대머리였다. 머리 옆과 뒤로 반절 정도만 머리칼이 남아 있었다. 옆얼굴에는 주름살이 비쳤다. 연하늘색 자켓을 입고 연회색 혼방 바지에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키는 150센티미터 정도로 젊은 여자보다 작게 보였다. 마른 몸에 허리를 곧추 세우고 두 발을 단단히 지지한 모습이었다.

  ‘… …’

  초로의 남자는 휴대전화를 꼭 잡은 한 손을 허리 뒤에 단단히 대고 다른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 …’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여자가 일어섰다. 남자의 뒤 편, 출구 쪽으로 움직였다. 자리가 불편해서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초로의 남자는 앉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옆에 숨어 있던 젊은 남자가 나타나서 앉아 버렸다. 그냥 젊은 남자가 아니었다. 20대 초반으로 체형은 작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검은색 상의에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상의가 달라붙는 옷이어서 체형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역삼각형 상체에 어깨 삼각근과 삼두근이 두둑했다. 남자는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자를 벗더니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자는 자세를 취했다.


  버스는 다음 정거장을 지나 돌곶이역 정거장에 다다랐다. 젊은 여자가 버스에서 내렸다. 주변 사람들도 우르르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내리고 있었다. 나도 내리려고 일어나 지갑을 단말기에 대었다.

  “카드는 한 장만 대 주십시오.” 소리가 났다.

  서둘러 지갑을 열고 카드를 빼어 단말기 쪽으로 내밀었는데 내 옆에 앉았었던 남자가 먼저 카드를 대었다. 승인소리가 났고 그와 동시에 그는 툭툭 밀치듯이 내 앞으로 지나치며 버스에서 내렸다.

  ‘뭐가 그리 바쁜가…’

  불쾌한 기분을 뒤로하고 무리 뒤에 걸쳐서 버스에서 내렸는데, 그 젊은 여자는 다시 버스를 타려 하고 있었다.

  ‘이런! 다시 타는 거였어…?’

  돌곶이역 지하철 입구로 다가서는데 붉은 신호 때문에 버스가 지하철 입구 앞 쪽에 정차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내가 앉았던 자리에 그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칭찬을 해야 하나 안쓰러워해야 하나. 그녀의 남은 길은 이제 편안할 것이다.

이전 17화 은행을 물어보는 어느 한 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