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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재 Sep 10. 2024

지하철 유토피아

9월 10일 출근길

  조금 일찍 나왔다. 오늘 아침, 기상 알람이 울리자 알람을 끄고 나서 타이머를 설정했다. 5분으로. 나는 거의 매번 알람을 끈 후 5분을 더 자려고 타이머를 설정한다. 타이머 알람이 울리면 다시 타이머를 설정하고 알람이 다시 한번 더 울리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몹쓸 버릇이다.


  오늘은 타이머 알람이 처음 울었을 때 바로 일어났다. 닦고 옷 입고 나온 시간이 평소보다 10여분 빨랐다. 버스도 지체 없이 와서 돌곶이역 대합실에 들어설 때는 다른 날보다 15분이나 빠른 시간이었다.

  “고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응암 방면 열차가 화랑대역에서 열차 고장으로 지연되고 있습니다. 고객 여러분께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일찍 나온 게 소용이 없네...'

  대합실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평소에는 출입구 자리에 한두 명이 서 있었는데 오늘은 대여섯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오늘은 1-3번 출입구까지 가지 않고 멀찍이 2-3번 출입구에 섰다. 환승이 빠른 것보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내리는 사람이 모두 하차한 다음 안전하게 승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차가 들어왔다. 출입문이 열렸다. 열차는 사람들로 시커멓고 출입구와 중앙 부분에만 일부 공간이 보였다.

  “최악인데...!”

  뒤쪽에서 걱정과 한숨 섞인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밀고 들어가려는 힘에 밀려 들어갔다. 언뜻 뒤를 보니 승강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반절은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열차 안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끼어 있게 되었다.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위치하고 시선은 20도 상향으로 향했다. 시선이 닿은 곳에 지하철 노선도와 전광판이 있었다. 전광판에는 지하철 에티켓을 알리려는 공익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피곤한지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여성 고객과 그 옆에 딸의 전화에 미소 짓는 나이 지긋한 남성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통화를 짧게 하고 끊은 후 딸과 문자를 나누는 배려심을 보여 주는 훈훈한 광고였다. 승객들은 다행히 다들 한쪽 방향으로 서 있어서 서로 마주 보는 식의 민망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음 역은 출입구가 반대였다. 내 앞쪽으로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다. 여기에서도 예닐곱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틈새를 찾는 눈길, 난처한 표정의 얼굴, 무표정하거나 회색의 그늘진 느낌의 모습들이었다. 자리는 더 좁아졌다.

  왼편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자세는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두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다. 그의 팔은 완강하게 굳어 있었다. 오른팔 팔꿈치는 내 왼쪽 가슴에 닿아 있어서 나 또한 팔로 저지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오른쪽으로 이동하려고 발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오른쪽 남자의 발이 내 발 옆으로 닿았다. 남자의 발 또한 완고해서 조금도 움직여 줄 느낌이 없었다. 불편한 자세로 다음 정거장으로 향했다.

  정거장에 가까워지자 내 앞쪽의 한 남자가,

  “내립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내립니다. 내립니다아아!”

  목소리를 올리며 내 옆으로 헤치며 지나갔다. 내리는 문은 내 뒤쪽이었다. 남자를 뒤따라 그의 어깨가방이 사람들에게 걸리며 ‘턱 끄윽 끅 터억 턱 터덕!’ 마치 비명을 내지르듯이 끌려 나갔다. 뒤에 한 여자가 이맛살을 꼬집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정거장을 지나며 차량이 몇 번 흔들거리고 나서 자리는 안정되었다. 좁은 틈새에서 기어코 휴대전화를 보는 몇몇을 빼고 대부분은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바짝 붙이고 웅크린 자세로 서 있었다.

  ‘순한 양처럼 순종적인 이 자세들은 뭐람!’

  그렇게 신당역으로 향했다.


  신당역에서 2호선으로 이동했다. 2호선 승강장도 사람들로 붐볐다.

  ‘뭐지? 6호선 영향을 받는 건가...?’

  열차가 들어왔다. 한 무더기로 걸쭉하게 토해내듯이 사람들이 나오더니 한 명 또 한 명 튕기듯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사람들이 이어서 나왔다. 신기하게도 지하철 속 공간은 나온 사람 수만큼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내 앞에 섰던 몇 명이 탔다. 출입구 슬라이딩도어에 사람들이 장벽같이 섰다. 한 사람이 발을 올리더니 밀고 들어가 되돌아서며 자리를 잡았다. 너무 밀었는지 그 사람 옆으로 틈새가 다시 생겼고 이때다 싶게 한 사람이 서둘러 탔다.

  출입문이 닫히기 전 승강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좀 전에 본 승강장에 있던 사람들과 매일반이었다. 표정 없이 초점 잃은 얼굴들.

  “현재 지하철 2호선에서는 전국 장애인… 상당 시간 지연될 수 … 무정차 통과 예정… 신속히 정상화될 수 있도록…”

  웅웅 하는 소음 속에서 안내방송이 나왔고 나는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신속하게... 정상화할 수 있다고? 풋!’


  잠실역에 도착했다. 승강장에서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계단의 5분의 3은 내려오려 하고 5분의 2는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대합실로 올라가려는 승객들이 계단 초입 승강장에 넓게 포진해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못 내려오고 있었다. 서로 세를 과시라도 하듯 정체전선이 만들어졌다. 올라가는 사람들이 한두 명 꾸역꾸역 올라가고 뒤이어 올라가며 승강장 쪽에 공간이 생겼고 그제야 내려오려는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올라가는 흐름에 섞여 들어갔다.


  이 정도면 유토피아 아닌가! 늦지 않게, 그리고 무엇보다 무사히 출근할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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