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출근길
추석 명절이 지났다. 5일이나 되는 긴 연휴가 끝났다. 본가를 찾아뵌 것 외에 별일 없이 연휴의 대부분을 보냈다. 아침 한 때 흐린 적도 있었지만 연휴는 맑은 날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날씨는 맑다.
버스정류장에는 대여섯 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 버스가 왔다. 이 버스는 내가 가는 방향과 아예 다른 쪽으로, 강북 도심으로 가는 버스다. ○○○번 버스가 언제 올지 사거리 앞쪽을 쳐다봤다. 버스의 귀퉁이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되돌려 보니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
‘모두들 □□□번 버스를 탄 거네.’
이 버스는 여섯 정거장의 좁은 도로를 오르락내리락 달려야 하고 경전철 공사로 늘 막히는 도로를 지나서야 환승할 수 있는 지하철역에 다다른다. 그즈음에서 버스전용차로가 시작되어 속도감 있게 움직이는 □□□번 버스. 하지만 □□□번 버스를 탄 사람들도 최선의 출근길을 택했을 것이다.
○○○번 버스를 탔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사거리를 기어올라 다음 정류장에 섰다. 승객들이 올라타서 서거나 앉거나 하며 자리를 잡았다. 버스는 출발하더니 바로 신호에 걸리며 다시 섰다. 왼쪽으로 밝고 강한 햇빛이 낮고 깊숙이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꺼먼 머리칼을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햇빛은 벽과 바닥에 반사되어 차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머리며 옷가지며 물건들을 레몬주스 빛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버스는 ‘웅웅웅웅 긍긍긍긍’ 울어 댔다.
버스는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후 정류장에서 사람들을 태웠다. 이제 햇살은 11시 방향에서 비치며 버스 창문을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아마도 창문에 들러붙은 도시의 먼지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리라. 먼지들도 어엿한 반사체다.
늘그막한 남자가 뒷자리 근처로 왔다. 하얀색 둥근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등산할 때나 어울릴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모자 아래로 흰 머리칼이 삐죽삐죽 나오고 검은 목둘레로는 잔주름이 깔렸다. 이인좌석 중간 통로에 불안스럽게 자리 잡고 뒤를 보면서 뭐라고 얘기했다.
“자리… 여기…, 자리…”
어눌한 말투에 버스 소음이 더해져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앞쪽에는 흰 머리칼을 동여매고 앞머리가 한 움큼 내려와 얼굴의 반을 가린 여자 노인이 서있었다. 그녀는 여러 색깔이 조합된 헐렁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어색한 복장이었다.
“오빠가 앉아…”
‘오빠?’
노인네의 투박한 목소리에 오빠라는 말은 생경하게 느껴졌다. 남자가 얘기한 자리는 맨 뒷자리였다. 4인석에 한자리가 남아 있었다.
“빈자리 많이 생겨…, 다들 내릴 거야…”
여자가 얘기했다. 남자는 버스의 흔들거림에 불안정한 자세로 서있을 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앉아…”
앉으라는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마침 여자 근처의 1인석 승객이 일어나며 자리가 생겼다. 여자는 노인을 쳐다보고 눈을 마주치며 끄덕이더니 그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이제 돌곶이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내리기 시작했다. 노인이 서있던 자리 바로 옆자리의 승객도 일어났다. 나도 일어나 노인 옆으로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노인은 나를 피해 비켜서려는 듯 자리에 앉으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그는 손쉽게 자리에 앉지 못했고 손잡이를 잡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의 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돌곶이역을 내려와 열차를 탔다. 줄의자 앞쪽에 자리를 잡고 섰는데 오른쪽 구석에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모습.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건네고 남자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답을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미소를 머금고 노부부의 얼굴은 옅은 레몬주스처럼 맑아 보였다.
이들의 평온해 보이는 모습에 버스에서 스쳤던 노부부도 ‘이랬으면…’ 하는 바램이 뜬금없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