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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재 Nov 08. 2024

행운을 주는 운전수와 지하철 활극

11월 12일 출근길

  갑자기 겨울이다. 며칠 전에는 늦여름이더니 세찬 비 한 번에 겨울이 와 버렸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트렌치코트는 갑작스레 퇴장하고 모직코트나 두터운 면코트가 주로 보이고 있다. 후드티나 가벼운 점퍼류도 꼬리를 감추고 패딩점퍼와 젊은 치들의 후리스가 여기저기로 돌아다니고 있다. 한 자리 수의 기온은 겨울 느낌을 불러왔고 이에 항복한 나무들은 낙엽을 쏟아 내리고 있다. 하지만 가을은 겨울이 밀어낼 때까지 자기 자리를 버틸 것이다. 우리가 좀 더 봐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점퍼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어깨를 웅크리고 걷는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나도 오늘 그렇게 걷고 있다.


  어제는 기다리지 않는 버스를 겪었다. 버스를 타고 뒤편의 자리에 앉을 무렵 오른쪽으로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내가 앉은자리까지 한 남자가 뛰어와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젊은 남자로 보였다. 동시에 버스는 출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남자는 뜀박질을 급하게 줄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가득 아쉬움이 일었다. 낭패를 당한 듯이 한 팔을 허공에서 한번 내리 휘둘렀다. 버스는 출발 후 서지 않았다. 요즘 기다려 주는 버스는 드물기에 남자의 포기도 빨랐다.


  오늘은 적극 기다려 주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려고 출입구 앞에 줄을 섰는데 내 앞으로 두세 명, 뒤로 한 명이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데, 40여 미터 떨어진 사거리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브라운 모직코트를 입었는데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뛰었다. 남자는 무단횡단을 감행하며 타고자 하는 의지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내가 탈 무렵에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아직 20여 미터.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을 때 남자의 뒷머리가 보였다. 다음 상황은 사람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버스는 출발했다. 잠시 후 사람들 사이에서 비집고 뒤편까지 들어오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성공이군!'

  남자는 상기된 얼굴로 숨을 돌리며 들어오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전화를 열었다. 남자는 웹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버스는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했다. 정거장 정차 후 승객들을 태우고 출발하려고 움직였다. 버스가 움직이자마자 운전사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는지 버스를 급하게 세웠다. 차로 변에 주차 차량들이 있어서 버스는 출발과 동시에 차선을 바꾸어야 했다. 이미 버스는 어느 정도 움직인 상태였고 차선에 반절은 걸치게 되었다. 운전사는 이런 번잡한 상황에도 승차문을 열어 승객을 태우고 출발했다. 승객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운전수는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했다.

  '행운을 주는 운전수네...'


  신당역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줄지어 내리고 줄지어 움직이고, 승강장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밀림을 이루었다. 갑자기 내 오른쪽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었다. 살펴보니 한 남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푸른색 가벼운 점퍼를 입었는데 점퍼가 허공에서 휙휙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이 남자는 빠른 속도에 더해 허리를 약간 굽히고 장애물을 피하듯이 정글 밀림 속 빽빽한 나무들을 스치듯이 요리조리 방향을 틀어가며 움직였다. 그렇게 10여 미터를 헤쳐가더니 열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열차는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방송과 동시에 출입문을 닫고 출발했다.


  환승통로를 지나 2호선을 기다리며 8-3번 출입구 앞에 섰다. 8-3번 출입구 앞으로는 대합실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있고 환승통로 쪽으로 사각의 거대한 기둥들이 네다섯 개 줄지어 있다. 환승하는 승객들은 기둥 사이사이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등장하듯이. '나 누구요!' '난 이런 사람이오!' 몸짓으로 얘기하며 나타나고 있었다.

  '잘 차려입었다면 패션쇼의 런웨이 같은 풍경?'

  허튼 상상을 해본다. 

  휴대전화를 보며 쌀쌀한 표정으로 주변에는 도통 관심 없다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등장과 동시에 전광판을 찾아 다음 열차의 위치를 확인하는 사람, 눈을 굴리며 여기저기 살피는 모습들도 보였다. 전광판과 더불어 특정 위치-아마도 게시물을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초점을 멀리 한, 그래서 눈길을 고정하지 않은 듯한 표정이 가장 많았다. 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굳어 있었다.


   열차가 들어온다. 사람들이 서두른다. 발걸음을 빨리한다. 제각각 즐겨 이용하는 위치까지 가려한다. 익숙함을 희구하는 것은 본성인 가. 열차의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승차하고 문이 닫힌다. 역시나 계단에서 급하게 내려와 출입문이 닫힌 열차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보인다. 늘 보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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