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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재 Nov 12. 2024

때 늦은 가을에 제각각 가는 사람들

11월 8일 출근길

  아침부터 바람이 거세다. 가을이 오는지 마는지 모기는 극성이고 아직 여름의 계절 같은데, 훅 가을이 급하게 치고 들어왔다.

  '게으른 가을 같으니라구…’

  길바닥에는 그동안 버티었던 나뭇잎들이 떨어져 가을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바닥에 들러붙은 낙엽들은 빗물에 어른거리며 돌바람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바람은 적지 않은 비와 섞여 세상에 내리쳤다. 사선으로 내리치는 비바람에 허벅지며 옆구리까지 비에 젖었다. 허리춤에 걸친 가방도 비를 피하지 못하고 방울방울 빗방울이 매달렸다. 종아리는 흠씬 젖었고 양말 틈새로 물이 들어와 질척한 걸음을 걷게 만들었다. 우산은 바람에 뒤흔들려 안간힘을 쓰며 두 손으로 우산대를 잡고 걸었다. 우산을 상체에 바짝 붙이고 최대한으로 웅크리고 바람을 향해 버티며 걸어갔다.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웬 꼬마 여자아이가 우산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인근 □□초등학교 학생으로 종종 걷는 걸음새와 키로 볼 때 저학년으로 보였다. 아이의 우산은 인기 캐릭터가 새겨진 비닐우산이었다. 우산을 꼬옥 쥐고 서둘러 사거리를 지나갔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라 건너편을 보니 아이의 아빠가 등가방을 메어 주고 손가방을 들려주었다.

  '아빠는 언제 온 거지…?’

  비바람에 아이의 출발이 늦어지자 아빠가 먼저 와서 버스를 잡았던 것인지 모른다. 스쿨버스 인솔자가 버스 출입구 앞에서 아이가 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바람에 또박또박 걸어 버스를 탄 아이는 오늘 벌써 한몫을 한 듯하다.


  ○○○번 버스를 비바람 속에서 6분을 기다려 탔다. 6분 동안 비바람은 약해졌다 강해지기를 반복했다. 그에 따라 빗줄기도 20도 정도 사선으로 내리다가 45도 정도로 기울어 내리기를 반복했다.

  6분을 기다린 버스는 승객들로 금방 찼다.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나 비에 젖어 후줄근한 모습들이었다. 여자들은 머리를 감고 덜 말린 것인지 비에 젖은 것인지 날씨가 맑았다면 싱그러울 수도 있는 표정이 오늘은 추레하기만 했다. 비바람 속의 걸음과 기다림은 사람들을 아침부터 피곤하게 만들었다. 휴대전화를 하는 사람들은 서너 명 정도, 대부분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었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손잡이 기둥에 어깨를 기댄 채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비 오는 김에 사거리를 건너 내릴까…’

  비도 오고 해서 평소 궁금했던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돌곶이역 사거리를 지나 돌곶이역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얼마나 내리는지, 먼저 내린 사람들과 얼마나 시간 차이가 나는지를. 정류장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이어져 내렸다. 버스는 '하차입니다' 기계음을 연이어 반복했다. 지칠 줄 몰랐다. 내릴 사람이 모두 내리고 나니 버스 안에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차선을 바꾸고 신호를 기다렸다. 먼저 내린 사람들은 줄지어 지하철 출입구로 내려가더니 이내 꼬리를 감추었다. 사거리 신호가 여기저기 바뀌고 이제 버스는 사거리를 지나 돌곶이역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나 빼고 한 사람이 더 내렸다. 사람들은 비가 오는 궂은날에도 한 정거장을 빨리 내려 1, 2분을 다투며 출근하고 있었다. 승강장을 내려가며 먼저 내린 사람들이 출발했을까 자못 궁금했다. 승강장에 내려가 보니 그들은 아직 승강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법이지만…’

  나도 모르게 입가에 힘이 들어갔다.


  열차가 들어왔다. 평소 타는 1-3번 출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2-1번 노약자석 출입구로 탑승했다. 출입구 바로 옆 노약자석에 덩치 큰 젊은 남자가 엉덩이를 내밀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얼굴은 벌겋고 자세는 흐트러졌다.

  '고된 퇴근길, 한 잔 걸친 건가...?'

  구석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들어온 중년의 여자가 냉큼 노약자석에 앉았다. 하얀색 니트에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얼굴 화장을 손보기 시작했다. 번지르르한 얼굴로 나이는 가늠되지 않았지만 노약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음 정거장에서는 늘그막 한 중년 여자가 탔다. 짧은 파마머리에 얼굴은 화장으로 윤기 있고 흐린 녹색 토퍼를 입었다. 둥그런 등가방을 메고 장우산을 들고 자리에 서둘러 앉았다. 여자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확실히 늙은 남자가 들어왔다. 낯선 상황에서 약간의 두려움을 가질 때의 표정이 남자의 얼굴에 깔려 있었다. 노약자석에 자리가 없는 상황에 대한 당혹함 같아 보였다.

  "저기에 자리 있어!"

  여자의 소리는 단호했고 남자는 엉거주춤 뒤뚱거리며 몸을 돌리더니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등산용 외투를 입고 검은색 피부에는 잡티가 보였다.


  그렇게 열차는 정거장을 지나고 신당역에 도착했다. 여자가 먼저 내리고 남자가 뒤이어 내렸다. 여자는 서둘러 앞서고 남자는 의외의 가벼운 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남자의 옆얼굴은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많은 사람들 속에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계단으로 걸어가며 앞서가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계단 위 왼쪽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 줄에 슬며시 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고 수평의 무빙워크 옆을 걸으며 속도를 늦추어 한번 두 번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도 남자도 그 짧은 눈길로는 볼 수 없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들의 행선지는 같았을까?'

  '그냥 인사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을까?'

  궁금함이 꼬리를 물었다.


  오늘은 모두들, 제각각의 길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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