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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un 03. 2024

우울의 우주에서 찾은 빛

실명이 왔다고 생각했다

  우울과 공허함은 인간의 본성에 늘 함께 한다. 그것은 고개를 숙이고 때를 기다리며 숨죽여 있다가 버겁던 마음에 빈틈이 보이면 고개를 내밀고 눈을 마주쳐 온다. 우울의 눈망울은 우주 한가득 떠있는 별들 같아서 한 번 마주하면 반짝거림에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정신 놓고 바라보던 별빛이 점점 사그라들면 칠흑같이 까만 우주 공간만을 남겨놓는 것이 우울의 얼굴이다. 그 시꺼먼 우주와 같은 우울은 우리에게 깊이, 넓이, 무게 등 어느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얼만큼인지 모를 그것의 부피에 잠식되어 갈 뿐이다.


  나의 우울은 대부분이 나로부터 기인한다. '나는 행복한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 나는 무엇인가' 따위와 같은 질문은 '나는 힘들다', '나는 갇혀있다', '나에게 나는 없고 엄마와 아내만 남았구나'라는 결론을 내게 한다.


  출산을 하고 백일 즈음이 지나 아이의 수면 시간이 길어지고 여유가 생기자 칠흑 같은 공허가 나를 찾아왔다. 우울함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아보았으나 답이 없었다. 그것은 우울'함'이 아니고 우울'증'이어서 나의 의지되로 흘러가지 않은 것임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을 아이와 함께하면 오로지 나의 시간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전쟁 같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9시,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품에 안아 '섬집아이'와 '작은 별'을 번갈아 부르며 잠이 들길 기다린다. 서서히 감겨오는 아이의 눈꺼풀을 가만히 바라보다 안 자려고 애쓰며 번쩍 뜨는 눈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그러다 도저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눈을 감은 아이의 얼굴에 뽀뽀하고 냄새를 맡아본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작고 소중한 아이가 또 있을까. 오로지 나에게 의지하여 세상의 전부가 엄마인 이 아이에게 포근하고 아름다운 좋은 세상이 되어주고 싶다. 아이가 깨지 않게 살금살금 내려놓는다. 어두운 방문을 열고 조심히 닫고 환한 거실로 나온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기를 잠시 서서 기다리다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온기가 없는 조용한 거실, 하루를 꼬박 밀린 설거지와 아이 젖병, 거실 군데군데 굴러다니는 기저귀와 장난감,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 이유도 알 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쏟아진다. 드디어 육아 퇴근을 하여 가뿐하다고 생각했던 얄팍한 마음 뒤로 깊은 공허의 늪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아침이 되고 아이가 울면 언제 우울함이 왔다 갔냐는 듯이 마음은 다시 평화로웠다. 아이를 돌보는 순간을 눈에 담고 웃다 보면 또다시 밤이 찾아왔고, 아이가 잠 들고나면 어김없이 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이 지났을까. 밤에만 찾아오던 우울은 낮시간에도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수유를 하다가 시계를 쳐다보면 눈물이 났고, 기저귀를 갈고 휴지통에 버리다가 눈물이 났고,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 순간에도 눈물이 났다. 혹여나의 눈물을 백일 남짓 된 아이가 알아차리고 불안해할까 봐 아이와 눈 마주치는 모든 순간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만들어진 의도된 웃음 뒤로 나의 눈물을 숨기고 싶었다. 그러다 하루는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일어서다가 옆에 있던 의자에 무릎을 부딪혔다.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았는데 그동안 억누르고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새 기저귀를 갈고 기분이 좋아 누워서 발차기를 하는 아이 옆에서 손으로 입을 막고 한참을 울었다. 그러고 눈물을 닦고 아이를 보는데 아이가 뿌옇다. 너무 울어서 잠시 그런가 보다 하는데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점차 어두워진다. 보이는 것도 안 보이는 것도 아닌 커튼이 쳐져 있는 것 같은 시야에 놀라 더듬더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 화면이 아지랑이 피고 일그러져 보인다.

"여보, 나 눈이 이상해 앞이 안 보여." 격양된 목소리에 놀란 남편은 곧바로 회사에서 뛰쳐나와 집으로 왔다. 날씨 좋은 맑은 가을 하늘에 어두운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소용돌이치는 시야에 걷는 발걸음이 메스껍고 겁이 났다. 오로지 손잡은 남편의 온기만을 의지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 정밀 검사 결과였다. 이러다 눈이 멀어버릴지 모른다는 걱정과  공포에서 벗어나서 다행임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랑하는 내 아이의 눈을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눈에 이상이 없다는 지금을 행복하게 했다. 갖은 이유로 나를 괴롭혔던 무기력함이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회복이 되어 갔다. 시련은 나에게 그 순간에 필요함을 깨닫음을 주기 위해서 온다.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당연하게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사사로운 행복, 함께하는 가족,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행복감이었다.


  엄마로서의 인생은 삶의 가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을 볼 때면 '나도 저런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가 아닌 '저렇게 잘생긴 아들을 낳은 엄마는 얼마나 뿌듯할까'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스쳐 지나간 나의 19,900원짜리 티셔츠는 비싸서 결제를 멈칫거리지만 59,900원짜리 아이 원피스의 결제는 쉽다. 완성된 음식을 예쁜 접시에 담아 아이 앞에 놓아주고,  내 몫에 음식은 조리 도구를 잠시 받쳐 놓았던 접시에 담아 먹을지라도 내가 초라하거나 가엽지 않다. 단지, 설거지거리를 한 개라도 줄여서 좋다. 아이를 재워놓고 늦은 밤 라면 하나를 끓여 먹을까 말까 함께 고민하다가 서로 눈 마주치고 신속하게 조리해 나누어 먹는 그 순간이 연애하던 시절 예쁘게 차려입고 데이트하던 때 보다 더 편하고 좋다.


  분명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우울의 잠식은 나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과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서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은 오늘은 어제 떠나간 이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하루였음을, 나의 남은 생 중 가장 젊은 날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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