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강쇠가> 속 가스라이팅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79/0004033641?sid=102
지난 6월 11일에 한 기사가 있었다. 한 남성이 경찰에게 "여자친구가 어제부터 금융감독원, 경찰이라 주장하는 사람과 통화하며 모텔에 나오지 않고 있다"며 신고했다. 경찰은 해당 모텔로 출동해 여성과 만나 지령사항이 적힌 메모로 보이스피싱임을 확신하며 악성 앱 설치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여성은 오히려 권한과 피해 책임을 내세우며 경찰을 의심하고 강하게 반발했다. 경찰은 계속해서 여성을 설득한 끝에 휴대전화를 건네받고 확인 결과 무려 3개의 악성앱이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여성은 "금융감독원에 가면 xxx 과장이 만나준다"라고 했다며 여전히 경찰의 말을 믿지 못했다. 조사 결과 피싱범이 신분을 사칭해 피해자를 모텔에 고립시킨 뒤 지속적인 연락으로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공기계처럼 만들고, 새로 개통한 휴대전화에 악성 앱과 개인정보를 이관시킨 것이었다. 피해자는 피싱범으로부터 심리적으로 통제된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다.
타인의 정신을 서서히 좀먹는 가스라이팅
가스등 효과로도 불리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상황과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어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이다. 즉 의도적인 왜곡을 통해 타인의 판단력을 흐려 타인인 본인이 생각하던 의사와는 다르게 따르도록 유도하는 세뇌 방식이다.
어원은 1938년 영국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했다.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 부인을 살해한 남편 잭이 온갖 속임수와 거짓말로 아내 벨라를 정신이상자로 만드는 과정을 그려낸다. 보석을 찾으려면 불을 켜야 하는데, 건물 전체가 가스를 나눠 쓰는 구조라 가스등을 켜면 다른 가스등이 어두워진다. 이때 어김없이 가스등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위층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불안해하는 벨라를 향해 잭이 비정상이라고 몰아가고 이러한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하면서 벨라가 자아를 잃는 행태에서 용어가 유래된 것이다. 이 연극은 1944년 미국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우선 관계가 형성되면 가해자는 상황에 비추어 기억을 왜곡시켜 피해자 스스로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 피해자의 감정과 심리를 축소시켜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만든 뒤, 어떠한 문제를 모두 피해자의 몫으로 몰아내 통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여기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갖고 매달리다 혹여라도 눈 밖에 날까 자신의 상식은 무시한 채 그저 가해자의 비난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가스라이팅은 타인을 향한 자신의 욕구를 억지로 강요해 판단력과 현실감각을 흐리게 하는 정서적 학대다.
연인 사이는 물론 친구, 가족, 직장동료 등의 가깝고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타인에 불신하고 압박을 가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그래서 가스라이팅은 현대 사회 전반에 파장을 미치는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억압하는 데이트 폭력이나, 특정 단체에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을 포섭해 복종하고 탈퇴를 막기 위해 끊임없는 설득과 물리적 위협을 가하는 등의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는 곧 정서적으로 가해지는 가스라이팅이 타인을 ‘노예’로 섬기는 간편하고도 치명적인 방식임을 알려준다.
반드시 혼자 상을 치르고 삼년상을 끝낸 후 자결할 것
가스라이팅을 통해 정서적으로 억압하는 행위는 동리(桐里) 신재효 선생(1812~1884)이 개작한 <변강쇠가>의 ‘변강쇠’와 ‘옹녀’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변강쇠가>는 기록으로는 전해지나 창(唱)이 전승되지 않는 실전(失傳) 7가 판소리 중 한 작품이며, '기물타령'으로 대표되는 등장인물들의 성(姓) 표출과 이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한동안 판소리 전승이 끊기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3S 정책(Sports, Sex, Screen의 첫 글자를 딴 것)에 의해 애로영화의 대상으로 포착된다. 그 과정에서 변강쇠를 대물(大物)의 대명사로 전면에 내세우며 성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포르노 영화의 대표 시리즈로 인식된다. 그러나 성적인 요소의 이면에는 변강쇠와 옹녀로 대표되는 개인의 욕망과 이를 억제하는 사회적 규범이 충돌하며 드러나는 유랑민의 좌절과 현실이 기괴하게 담겨 있다.
삼남 지방에서 난봉꾼으로 떠돌던 '천하의 잡놈' 변강쇠, 평안도 월경촌에서 청상살(靑孀煞)로 결연한 남자들이 온갖 사유로 모두 죽음을 맞자 풍기문란으로 쫓겨난 '음녀' 옹녀가 개성 부근의 청석골에서 만나 부부가 된다. 옹녀는 들병장사, 막장사, 낮부림, 넉장질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나 살림보다 집안 제사를 맡을 자식을 낳으려 성행위에만 매몰된 변강쇠가 돈을 노름판과 술에 모두 탕진한다. 이에 옹녀는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 게으름만 놓는 변강쇠에게 나무를 베어오라고 말한다. 그런데 변강쇠는 그만 장승을 뽑아오게 되고 후에 분노한 장승들에게 만 가지 병을 얻으며 결국 장승 죽음을 맞는다. 이때 변강쇠는 죽기 직전 옹녀에게 유언을 남긴다. 자신이 죽은 후 사나이는 물론 열 살 아래 아이까지 죽은 자신의 몸에 손을 대거나 집 근처에 얼른하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니 옹녀 순수 혼자 상을 치르고 삼년상이 끝나면 열녀로서 자결하라는 것이다.
막상 옹녀는 혼자 치상을 치르기 어려워 주변 남자들을 유인해 중, 초라니, 풍각쟁이패들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치상을 도와주려던 이들은 변강쇠의 시신을 보고 줄줄이 죽게 된다. 이후 소문을 듣고 찾아온 '뎁득'은 변강쇠의 눈을 긁어 간신히 시신들을 묶은 뒤 옹녀와 정착을 약속한다. 뎁득은 각설이패와 함께 치상을 치르러 변강쇠와 남자들의 시신을 들고 북망산으로 향하는데 그만 시신들이 땅에 부착되고 만다. 그러자 계대네가 굿판을 벌여 땅에서 떨어뜨린 뒤 북망산에서 시신들을 묻었으나, 변강쇠의 시신이 뎁득의 등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시신을 절벽에서 갈아 변강쇠의 원혼에게서 풀려난 뎁득은 끝내 옹녀와 결합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옹녀는 아무 소식 없이 사라지는 부지소종(不知所终)의 결말을 맞이한다.
주목할 점은 변강쇠가 죽기 전 옹녀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부터다. 수절을 바라던 변강쇠는 옹녀를 다른 남자들과 정착할 수 없게 유언을 퍼부어 열녀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이끈다. 이후 변강쇠는 원혼이 되어 자신의 유언대로 치상을 도우러 온 남자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내 옹녀의 심리를 끊임없이 축소시킨다. 이들의 죽음이 마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옹녀는 뎁득과 정착을 약속하자 변강쇠는 그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다. 치상을 치르는 뎁득의 몸에 끝까지 붙어 유언을 소문으로만 접했던 그에게 저주의 신뢰성을 높여 옹녀와의 정착을 포기하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변강쇠의 저주에 매달리게 된 옹녀는 자신의 청상살 팔자에 인정하며 더 이상 남자를 만나지 않게 되면서 결국 옹녀를 타인과 고립시키는 변강쇠의 완벽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상황에 결코 순응하지 말자
옹녀는 변강쇠와 만나기 전 결연한 남성들의 죽음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데도, 마을 공동체로부터 성적으로 문란한 음녀로 낙인찍혀 억울하게 쫓겨난다. 그녀의 '남편 찾기' 과정에는 색정적인 묘사에 매몰되지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 집이라는 물질적 공간에 가족이 존재하는 안정된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간살이를 꾸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무엇보다 갈망했다. 하지만 열녀를 향한 변강쇠의 저주로 자신의 희망과 현실이 맞부딪히며 정착 의지는 더욱 희미해진다. 결국 변강쇠의 이기적인 욕망과 횡포로 옹녀가 서서히 정서적 감각을 잃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아갈 수 없기에, 나아가 앞으로도 자신을 억압할지도 모르는 변강쇠의 지배에 벗어나고자 스스로 유랑길을 떠나 행적을 감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변강쇠와 옹녀의 관계는 오늘날 가스라이팅 사례와 맞물려 있다. 변강쇠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지배해 자기의 것으로 복속시키려는 행위는 오늘날에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가해자의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과 자존감의 손상을 타인에 대한 통제와 권력으로 채워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잠재해 있다. 문제는 피해자가 이를 인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현실을 부정하며 가해자를 두둔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해자는 자신의 통제적이고 가학적인 행위를 '피해자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해 피해자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이러한 행동을 특정한 상황이 아니라 마치 삶의 방식처럼 일삼고, 피해자는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착을 의지하던 옹녀의 삶을 무너뜨린 변강쇠의 유언처럼 가스라이팅의 피해는 계속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가해자가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상황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관계를 형성하면서 드러나는 비난으로 자신이 못난 사람으로 여기거나 판단력이 흐려진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초기에 그 상황을 문제 제기 없이 넘긴다면 가해자가 심어놓은 함정에 넘어가는 것이고, 가해자의 생각에만 동조할 정도로 자주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2014년 판소리 일곱 바탕 복원시리즈를 통해 <변강쇠가>를 개작한 국립창극단의 <변강쇠 점찍고 옹녀>가 있다. 여기에서 옹녀는 앞서 살펴봤던 신재효본과 달리 적극적으로 운명에 맞서 사랑을 쟁취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변강쇠의 동티살에 맞서 전국각지를 돌며 자신의 청상살로 장승들을 홀려내 정념에 불타게 만든다. 그러자 멸족의 위협을 느낀 장승들이 변강쇠를 다시 옹녀에게 돌려주고, 변강쇠도 사리사욕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뱃속의 아이와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창극에서의 옹녀는 자신을 음녀로 규정하던 성을 오히려 무기로 활용해 변강쇠와 장승에게 삶을 통제받지 않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면서, 마침내 변강쇠를 다시 이승으로 복귀시켜 끝없이 갈망하던 주거와 가족의 정착을 이루게 된다.
필자 또한 청소년 시절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이라고 되받아치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변명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이 남들보다 필자를 잘 안다며 지나치게 예민하다며 실수로 꼬집곤 했다. 만난 지 두 달 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상대방을 안다고 자부하는 태도가 거북했던 필자는 결국 한 달 뒤에 이러한 태도가 계속됐던 친구와 관계를 끊었다. 만약 그 불쾌함에서 문제를 포착하고 부정하지 못했다면 필자는 학교 생활 내내 그에게 시달렸을 것이다. 약 세 달 동안 지속된 그의 가스라이팅은 잠깐이었지만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고 그의 말이 타당할지도 모르는 왜곡된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었다.
결국 가스라이팅을 견제하려면 개인과 타인의 생각을 명확히 구분할 '주관'이 필요하다. 주관을 통해 상대방의 왜곡된 생각을 부정하며 본인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만에 하나 존엄성을 해치는 언행은 그 무엇도 정당화될 수 없기에 단호하게 대처할 힘이 필요하다. <변강쇠 점찍고 옹녀>의 옹녀처럼 자주적인 삶은 가해자의 억압에 '반대'하는 힘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 한다. 앞으로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면 가스등의 불길은 완전히 꺼지지 않더라도 그 불길이 뿜는 연기가 걷히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https://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4801
https://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4330
https://www.newstree.kr/newsView/ntr20230511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