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주중엔 에어컨 바람 덕에 그럭저럭 버틸만했는데, 문제는 주말이었다. 에어컨을 틀려면 집에 있는 모든 방문과 창문을 닫아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 더위를 택했으니 누굴 탓할 것도 없다. 기후위기에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들기름 막국수와 샌드위치를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세 잔이나 마셨지만 에너지는 전혀 소비하지 않은 채 저녁을 맞았다. 해가 뉘엿뉘엿 모습을 감출 무렵, 올해 들어 두 번째 야외 러닝을 하고 왔다.
보통 야외 달리기를 하면 10km 코스를 돌고 오곤 한다. 한 호흡에 10km를 다 뛰는 건 아니고, 5km를 채우고, 나머지 5km는 컨디션에 따라 걷다 뛰다 한다. 지난번엔 3km를 겨우 채우곤, 공유 자전거를 타고 귀가했던지라 오늘도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난번 글처럼, '한계를 규정짓지 말자'라고 스스로에게 선언한 만큼 기록을 조금 정확하게 측정해서, 약간 도전적인 수준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목표는 5km, 유지가능한 페이스를 찾는 것이었다.
가벼운 하이킹 팬츠와 나시티를 입고, 20:00께쯤 달리기를 시작했다.
첫 1km 때 오버페이스를 해버려서, 5km를 다 채우지 못했다. 경험상, 첫 1km는 아쉬울 정도의 속도로 서서히 웜업을 해서 점점 속도를 높이다가 마지막에 지속가능한 페이스로 달리기를 마무리하는 게 가장 좋다. 지금 나의 러닝은 완전히 반대의 모양이다. 욕심을 부리면 멀리 가지 못한다.
5킬로 달리기를 그럭저럭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다른 러너들을 구경했다. 각자의 목표치를 가지고 달리는 사람들은 나이도, 성별도, 뛰는 모양새도 다양하다. 달리기의 어느 지점에 와있는지, 오늘의 컨디션은 어떤지, 달리기를 한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직접 물을 순 없으니 상대의 달리기 하는 모습을 보고 혼자 추측해보곤 한다. 오늘은 전형적인 마라토너의 몸매를 한 러너가 규칙적인 페이스로 달리는 걸 보았는데, 그분은 한 번에 몇 킬로씩 달리는지 묻고 싶었다.
달리기는 그야말로 관절의 움직임과 호흡만으로 지속해 나가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신체 활동이다. 그래서인지 쉽게 지루해지기도 하지만, 그 지루함을 조금 버티고 나면 고요가 찾아온다.
홀로 하는 달리기는 그런 의미에서 고요를 만나기 딱 좋다.
욕망이 성취를 추동하는 시스템 속에서 고요해지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밖에서도, 안에서도 시끄러운 소리들이 매 순간 나를 점수매기는 기분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면 체중계에 올라, 어제의 내 식생활과 신체활동에 대한 평가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를 닦는 순간에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며, 매일 새로이 업데이트되는 체크리스트를 보며 억지로라도 치어럽 하기 위해 애를 쓴다.
대단히 엄청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러고 산다. 그러다 보니 신경은 예민해지고, 패배감은 자주 찾아온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무능감을 견디지 못해 타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나는 그 비난의 화살 뒤에 숨어 한숨 돌리기도 하지만, 결국 나 또한 과녁이 되어 비난 세례를 받곤 한다.
한동안 명상이 유행을 했었는데, 호흡에 집중하라는 그 모호한 지침을 따르는 게 쉽지 않았다. 생각해 봐라. 친구라고 생각했던 자가 전 남자 친구와 내 뒤에서 매일 연락을 주고받은 걸 뒤늦게 알아챈 와중에 호흡에 집중하는 일이 가능할지.
그래서 달렸다. 네가 유난스럽다고 나오는 그 여자와 남자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분노는 결국 나를 잡아먹을 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달리기밖에 없었다. 무작정 달리다 보면, 그 끝에는 분노조차 지쳐서 사라지는 고요가 찾아오곤 했다.
고요 속에서 나의 삶은 다시 현재에 집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인간들 따위야 뭐람, 너나 가져라 그딴 똥. 나는 일단 이 달리기부터 마치고 보자, 하는 그런 단순한 감정들이 나를 달랬다. 한 번 달리고, 두 번 달리고, 수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새 나의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바깥으로 나가보자>하는 자연스러운 회복을 맞곤 했다. 달리기는 만병통치약이었다. 홀로 달리기는, 내가 죽는 순간까지 지속해나가고 싶은, 나의 가장 좋은 습관이다.
한 주를 달리기로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또 인생이라는 기나긴 마라톤의 어느 지점을 헐떡이며 지나고 있을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삶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만의 불행도 아니요, 우리 모두가 겪을 법한 일이니 너무 외로워 말아야지. 복잡할수록 심플한 길을 택하는 연습을 지속해나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