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가득 채운 계곡 풍경이 펼쳐진다. 비록 영상에 불과하지만, 아늑함을 준다. 회면이 나를 끌어다가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 같다. 머릿속에는 이런 이미지가 편안하다는 느낌으로 각인되어 있다. 좋고 싫음은 마음에서 느끼는 것이다. 어떤 수치적 제어에 의해 재단되는 건 아니다. 경쾌한 음악이 덧칠된 장면은 더 감미롭다. 그것을 굳이 공리주의적으로 계산해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삶에서는 무수한 계산이 따른다. 어떤 것이 이익이고, 또 어떤 것이 손해인지를 끊임없이 계산하는 것이다.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도 설명은 된다. 조용한 호숫가는 복잡한 일상을 잠시 떠나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는 것이니, 공리적으로 이익이다. 그러나, 자연은 저렇게 가만히 놓아두더라도 큰 위안인 데, 나는 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짐이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따르면, 이 잔잔한 수면이 거꾸로 나에게 돌을 던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 데 자연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행사한다. 그것이 자연이 어떤 작동을 했다기보다는, 인간의 심성이 그러하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것이 무슨 형량 기준이 있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건 아니다. 자연의 역습이라는 표현 자체도 사실은 사람이 지어내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라고 지칭하는 것조차, 사실은 자연과 무관할 것이다. 자연은 자연이 할 바를 하는 것뿐이다. 자연의 공리주의는 이해타산을 통해 작동하지는 않는다. 흉악한 범행을 저지른 존재에게도 자연은 그를 관람할 권한을 빼았지는 않는다. 선한 일만 하는 사람에게도 재난은 덮친다. 하늘이 왜 그것에 응답하지 않느냐는 의문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공리주의로는 설명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동된다면, 그것은 '인공적 자연'이다. 잠잠한 파도는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까닭이나 구분 없이 해안가 사람을 덮치기도 한다. 자연의 공리주의는 인간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거나 관계없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마저 원칙으로 삼아 재단한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면 선, 그렇지 않으면 악이다. 이 인위적 기준이 억지이듯이, 자연의 작동도 그렇게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