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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페스

입술에 난 포진

by 트래거

나의 컨디션을 나타내주는 몸의 반응이 있다.

나와 평생을 함께한 바이러스 녀석이다. 헤르페스 1형 입술에 나타나는 포진. 구순포진.

내 몸속에 잠들어 있다가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 귀신같이 나타난다. 나보다 나를 더 잘하는 바이러스다.


바이러스의 출처는 어머니일 것이다. 피곤하시면 나와 똑같이 입술로 반응이 오신다. 이런 바이러스에 무지했던 시대에 사셨던, 나를 제일 사랑하신,

어머니는 나에게 평생을 함께할 헤르페스를 주셨다.


입술에 포진이 올라오면 짜증이 나지만,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조금 쉬어라 트래거야"라는 듯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힘든 것에는 익숙했다. 익숙해서 그런지 아무리 힘들어도 할 걸 꿋꿋이 하는 미련한 성향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시킨 일을 끝내고 집에 와서 공부를 하는데 코피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듯 콸콸 쏟아졌다. 그리고 열이 38도까지 올랐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시킨 일은 짚단을 쌓는 일이었고,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했다. 몸이 좀 뜨거웠지만, 오늘 해야 할 공부는 해야지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난 아팠다. 시골에서 응급실은 가지 못했고 다음날 병원에 가서 주사를 꽂고 쯔쯔가무시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병원에서 처방을 받고 나왔다.

부모님은 이놈아 무식하게 참기는 왜 참아..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니 뭐 이 정도는 괜찮은데.. 아프다는 게 뭔데.. 힘들다는 게 뭔데... 그냥 다들 이렇게 사는 거잖아..

중학교 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그냥 이런 게 나였다.


30살이 넘어서면서 포진에 대한 대처 방법이 생겼다. 입술이 간질거리면 미리 병원에서 처방받은 팜시크로버라는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한다. 그러면 간지러운 게 사라지면서 가라앉는다. 이게 타이밍 중요한 게 간지러움과 피곤함을 참고 하루가 지나면 그다음에는 약을 먹어도 생기게 된다. 초반에 잡는 게 중요하다. 최근에 힘듦이 겹겹이 쌓였다. 그래서 알코올과 피곤함이 겹쳐지면서 어김없이 입술에 찾아온 헤르페스. 하루를 참았더니.

2주간 입술에서 이 녀석이 나에게 쉬라고 손짓한다.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 져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는 '엄마'를 눌러본다. 걱정할까 봐 입술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난 잘 지내는데 엄마는?

엄마 무릎은 괜찮아?

엄마 아프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하면서 싱겁게 마무리한다.


헤르페스


엄마가 내게 준 선물

거울에 비친 입술 한쪽을 매만진다.


고양이가 천천히 지나가면서 누워있는

나의 입술에 털을 살랑살랑 부딪히는 것 같은

간지러움에 입술을 달짝 인다.


갑자기 찾아온 생체리듬의 변주곡에

무라카미 하루키다 된 듯 커티삭을 한 움큼 삼킨다.


하루를 기다린다.

그리움, 사랑, 연민이 느껴지는

20일을 기다린다.


엄마가 보고 싶다.


문득,


문득,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몰라서 힘든 것도, 아픈 것도 모르는

그러다가 다시 돌아온다.


마음이 무너지는 하루들이 힘들 뿐.


몸이 힘들면 거울을 본다.

마음이 힘들면...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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