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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02화
2.1. 그 케이크가 뭐라고
2. 보금자리
by
민달팽이
Aug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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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러시아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
8년 전 초여름, 아주 시끄러운 저녁의 집밥집이었다. 회사원 아저씨들의 이야기 소리는 음식점을 웅웅 가득 채웠고, 뒤에서는 부엌에서 식기를 세척하느라 쇠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엄마의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소리가 조용해지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내가 살던 동네에서 서울로 올라와 적응을 할 때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얼마나 정이 많은지 알기에,
4년 동안 일구어온 나의 길을 또 허물러 온 부모님의 계획은 절대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누가 그런 날벼락같은 말을, 누룽지를 긁다 듣게 될 줄 알았겠는가.
적어도 나에게 선택지가 있을 거라 믿던 나는 절대 수긍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집에 돌아갔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밤 11시에 모이는 게 일상이었다.
아빠는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셨고,
엄마도 점점 숨통을 죄어오는 우리의 사교육비에 일을 끝마치고 오시면 이미 시간은 늦었으며,
오빠와 나는 학원에서 맴돌다 들어오면 11시가 다가왔다.
그날 밤도 우리 가족은 11시에야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로 모두가 모일 수 있게 되었다.
얼큰하게 취한 아빠의 손에 들린 케이크를 받아 들고,
나는 조용히 부엌으로 걸어 들어왔다.
혼자 있는 동안, 나는 여러 번 나의 대답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걸 금세 알게 되었다.
현관에서 가족들은 오래간만에 마음껏 웃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천천히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일이 바빠서 우리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었다.
아빠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셨고, 그 당시에도 나는 아빠가 좋은 아빠라는 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랐다.
감정의 변화가 많이 없는 아빠가 유일하게 소리 내 웃었을 때가 일요일 아침 1박 2일을 볼 때여서 나는 티브이를 보는 아빠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나에게도 아빠의 얼굴에는 늘 어두운 그늘이 쳐져있다는 것을,
특히 서울로 올라오고 하루하루 점점 그 그늘이 넓어진다는 것은 모른 척하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근데 그날, 현관에서 신발을 겨우 벗고, 엄마와 오빠에게 부축을 받으며 부엌에 있는 나를 안으러 오는 아빠는 내가 본 아빠 중에 가장 밝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다 괜찮을 거야, 다 잘될 거야”
아직도 나는 아빠의 그 말은 누구를 향한 거인지 잘 모르겠다.
벅찬 회사 생활에 치인 스스로를 위한 말이었는지,
끝없는 걱정에 지쳐가던 자신의 아내를 위한 말이었는지,
생각보다 스스로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에 점점 위축되던 고등학생 오빠를 위했던 말이었는지,
그런 셋을 바라보던 나를 위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우리 가족 모두를 향한 말이었는지…
케이크를 참 좋아하는 나인데,
비싸서 자주 먹지도 못하는 케이크인데,
이상하게도, 그 케이크가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빠가 처음으로 너무 행복해 보여서,
앞으로의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찬란할지 말하는 아빠가 낯설지만 좋아서,
그래서 나는 끝내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서울에서 쌓아 올린 시간은,
아빠가 이 순간 하나를 위해 견뎌낸 시간보다 훨씬 덜 아팠음을 눈치챘었나 보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달라지든,
우리 가족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가벼운 밤이 많아진다면 -
그래, 그런 미래도
살아볼 만하겠다 싶었다.
그 케이크가 뭐라고,
그 웃음이 뭐라고,
그날 밤은, 나도 모르게 나의 인생의 방향을 바꿔버린 밤이었다.
그렇게 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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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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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민달팽이
01
1. 프롤로그: 나는야 민달팽이
02
2.1. 그 케이크가 뭐라고
03
2.2. 뼈가 시리도록 추웠던 겨울
04
2.3. 떠나야 할 때
05
2.4. 낯설어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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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차 해외생활 중인 대학생이 방황을 품에 안고, 자신을 닮은 마음 속 집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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