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인줄 알았는데 양극성장애래

나의 정신질환 일기

by ouroboros

chapter5. 태양광 조증 2



조증이 찾아오면 괜히 무언가 소비를 하고 싶어 진다. 나의 경우에 평소에 잘 자제하거나 필요 없다 판단되어 사지 않았던 물건들에 눈길이 가고 괜히 비싼 명품들을 둘러보거나 멀쩡한 차를 바꾸려는 시도도 한다.(평소엔 명품에 관심도 없고, 차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차라는 게 잘 굴러만 가면 그만 아닌가.)

정확하게는 물건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물건을 사면서 느껴지는 '만족감'을 쫒는 것이다. 그 '느낌'을 쫒느라 허비한 돈과 시간이 셀 수 없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 이십 대 초반에 필요도 없는 차를 캐피털을 끼고 할부를 때려 차를 구매한 적이 있다. 차 선택부터 계약서 작성까지 하루 만에 이루어졌고, 일주일 뒤에 내 손으로 차키가 들어왔었다. 중고차도 아니고 신차를 겁도 없이 구매했었고, 5년간 그 빚을 갚느라 생활에 필요한 금전이 부족해 자주 고생했었다. 그때도 내가 스스로 조울증이고, 조증의 영향으로 차를 충동구매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저 여러 필요에 의해서 차를 산 것이라고 합리화하기 바빴다.


물건을 사면서 다른 곳에서 발생한 나의 결핍을 채우려는 듯한 느낌을 스스로 받았다. 그 결핍의 원인, 원점을 찾을 생각도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하였다 하더라도 어디서부터 시작된 결핍인지 알 수 없었다. 정신분석에서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성인기까지 영향을 미쳐 나의 지금 행동은 과거의 외상으로 인한 어쩌고저쩌고...

당최 알 수 없는 말 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한 방임에 가까운 경험, 학창 시절 왕따, 우울한 가정사, 잘 발달되지 않은 대처능력, 충동 조절 문제 등등 꼽을 문제가 너무도 많지만 그 당시에 내가 그런 걸 생각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본다. 또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력감과 우울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도 되지 않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찾아오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느낌이 결국엔 공황장애로 번져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러, 나는 이 이유를 들어 차를 구매했던 것이다.

만약 지금 내가 그때와 같은 상황이라면 대중교통을 다시 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이나 작은 노력이라도 해본 뒤에 다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비 욕구가 찾아오면 대부분 충동적으로 소비하게 때문에, 물건을 사고 난 후 아주 잠깐 만족감을 얻으면 조증이 사그라들며 갑작스럽게 열린 문처럼 나를 당황시키며 현실 감각이 돌아온다.(조증이 사그라들고 찾아온 것이 우울이든 정상기분이든 조증의 들뜬 기분이 가려놓았던 현실감각이 슬며시 '나 여깄 어'하고 수줍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차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신나게 차를 몰고 다니며 기쁨을 만끽했지만, 한 달 뒤 차량 대금 명세서와 차량 대금을 치르고 난 뒤 수중에 남은 적은 금전과 그 금전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각종 공과금, 핸드폰 요금, 생활비 등등이 나를 다시 현실로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돌아온 현실 감각과 함께 이제 더 이상 쓸모없어진 물건들이 골칫덩이가 되어 나를 괴롭힌다. 그뿐이랴, 그 모든 물건을 구매하느라 구멍이난 지갑과 빚들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하다.

이미 구매해서 한 달이나 탄 차를 무를 수도 없었고, 쉽사리 차를 구매하겠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남몰래 울며 불며 알바를 3개나 뛰며 돈을 충당했었다. 그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했더라면, 5년간 차량 대금으로 골머리를 앓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 '당근'이 나의 구세주가 되어 조금이나마 구멍이난 내 재정을 메꿔 주었다. 덕분에 난 당근의 달인이 되었다. 당근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지금쯤 길거리에 나앉았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낯선 사람에게 나의 실수 혹은 조증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을 판매한다는 게 마치 내 실수를 남에게 떠맡기는 것처럼 느껴져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여유롭게 스몰톡까지 가능한 경지에 이르렀다. 요즘엔 당근을 거의 안 하지만, 한때 나는 당당히 당근 판매 게시글에 이렇게 써넣었다.


'충동구매 ㅇㅇ브랜드 바겐세일'


이제 나는 조증 상태 일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 신용카드를 없애버리고 산지가 5년째다. 옆에서 필요 없는 소비를 하면 말려줄 사람도 있고, 나 스스로 생각했을 때 필요 없는 물건이라면 차라리 구매 후 환불을 하던가, 정 급한 물건이 아니라면 목록을 작성해 놓고 한 달 정도 뒤에도 필요하면 그때 구매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번거롭긴 해도 이 방법들이 나를 더 이상 '감당 못할 물건을 구매하고 후회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물론, 조증 일 때 충동구매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문제가 여러 가지 형태로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중 나 스스로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인간관계'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조증의 나는 주변인들로부터 꽤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밝고, 쾌활하고, 주변을 즐겁게 하는 적절한 농담을 하기도 하고, 외모에도 신경을 쓰니 누군가에겐 아주 매력적인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나 스스로도 자신감이 차오르고 자존감이 충만하여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거나 '뭐든 잘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 그 느낌에 중독되어 현실적인 문제를 잊기도 한다. 우울 상태일 땐 매일이 걱정이었다면 조증일 땐 마치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실제 하는 문제가 사라진 것도, 해결된 것도 아니고 뒤통수에 착! 달라붙어 나를 괴롭게 했던 현실문제들이 느슨해져서 뒤통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뿐인데.

스스로가 조증 인 줄도 몰랐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때 그거 조증이었나'라는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대부분 인간관계에 관한 것들이 그렇다. 친구를 사귀거나, 연인을 사귀는 일은 조증으로 인해 기분이 고점을 찍었을 때 이루어졌었다. 헤어짐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첫 우울증 진단을 받은 건 열네 살 때다. 그리고 양극성장애 진단을 받은 건 스물아홉 살 때다. 약 15년 동안 진단명이 양극성장애로 변할 때까지, 정신과적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의 인간관계가 어땠을지 생각해 보라. 물론, 정신과적 문제를 안고도 인간관계를 잘해나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조증상태에서 사람을 사귀었다가, 조증이 사그라들면 내가 이 관계를 왜 맺었는지, 이 관계에 대해 적절한 책임을 갖고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심지어 충동적으로 연인을 만들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보면서 죄책감과 미안함, 나 스스로에 대한 혐오마저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관계는 좋게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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