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1
누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커버 사진에 올린 빈센트 반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이야기한다. 이 그림에는 동생과 조카를 사랑하는 반 고흐의 마음이 담겨 있다.
24살에 신규 발령을 받고, 돈을 벌게 되면서 주말에 서울로 뮤지컬과 콘서트, 연극, 각종 전시를 보러 많이 다녔다. 토요일 오전 KTX를 타고 가서 낮공과 밤공을 보고, 일요일 오전에 미술관 갔다가 또 낮공과 밤공을 보고 부산역에 일요일 밤늦게 도착하는 지금 생각하면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는데 20대라서 힘든지도 몰랐던 것 같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KTX 안에서 프로그램북과 도록을 넘겨 보면서 2일 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하다 보면 마치 꿈을 꾼 기분이 들었다. 월급이 얼마 되지 않던 시절 기차값도 각종 공연의 티켓 값도 큰돈이었으므로 올라간 김에 최대한 많은 것을 하고 와야지라고 생각했고, 보고 싶은 뮤지컬 캐스팅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티켓을 예매하면서 서울 여행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일상에서 오는 힘든 일들을 이겨냈다.
사실 처음에는 각종 공연은 좋아했지만 전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학창 시절 여러 그림을 접하면서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는 것과 그냥 책으로 보는 것이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뮤지컬과 콘서트는 영상으로 보는 것과 가서 보는 것이 당연히 다르다는 생각에 관심 있는 모든 공연을 보려고 했지만 미술관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을 바꾸게 해 준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했던 '빈센트 반 고흐전‘이었다. 반 고흐는 워낙 유명하니 실제 그림을 한 번 볼까 하고 갔는데 정말 좋았던 기억. 책으로 보는 그림과 실제로 보는 그림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면서 본 반 고흐의 그림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후 빈센트 반 고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른 그림들도 찾아보며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놓은 책도 읽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반 고흐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첫 경험은 참 중요하다. 뮤지컬도 미술관도 처음 경험했을 때 좋은 기억을 받아야 그다음에도 계속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테니... 아무튼 나는 반 고흐전 관람 이후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직접 보게 되면 책과 노트북 화면에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색감도 다르고, 평면의 그림이지만 실제로 보면 생동감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여러 미술관에도 종종 가게 되었고, 서울에서 열리는 구스타프 클림트, 데이비드 호크니, 에드바르 뭉크 등의 전시가 있으면 꼭 보려고 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을 유럽으로 갔을 때는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림에 빠져서 프랑스어 가득한 작은 도록도 구입했다. 전시 관람 이후 좋았던 전시는 꼭 도록을 구입하는 편이다. 도록을 보고 있으면 그때 그림을 관람했던 좋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전시를 보다 보면 원래 알고 있었던 유명한 그림도 좋지만 내 마음에 쏙 드는 그 화가의 그림 중에 내가 모르는 그림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데이비드 호크니 그림도 몇 개만 알고 전시를 보러 갔었는데 실제 전시를 보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나의 부모님'이었다. 그리고 에드바르 뭉크도 누구나 아는 절규만 알고 전시를 보러 갔었는데 가장 좋았던 그림은 '달빛 속 사이프러스'였다.
초록초록한 나무와 자연에 진심인 나는 초록초록을 누구보다 예쁘게 잘 그리는 프레리 작가님과 박지영 작가님의 그림도 좋아한다. 부드러운 일러스트로 책 표지 작업도 많이 하시는 이큐태 작가님의 그림도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이라 이 세 분의 작가 활동은 인스타를 통해 꾸준히 지켜보고 있다.
꼭 가보고 싶었던 미술관 중에서 일정이 맞지 않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환기 미술관이다.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실제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건희 컬렉션에서 몇 작품을 실제로 보긴 했지만... 올해 장기간 휴관에 들어간 환기 미술관이 다시 전시를 시작하면 꼭 가볼 예정이다. 예전의 나처럼 미술관에 가는 재미를 모르는 분들께 꼭 한 번 가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한 번만 가보면 나처럼 미술관에 가는 재미에 푹 빠져서 '어디 좋은 전시 없나?' 하며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