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에게는 있고 내겐 없는 아빠와의 추억
요즘 유행하는 밈이 있다.
"너 T야?"
상대방이 너무 이성적으로 이야기한 나머지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할 때 공감을 좀 해달라는 뜻으로 쓴다.
이 밈은 성격유형검사 MBTI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떤 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사고(thinking)와 감정(feeling) 중 어느 것을 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T와 F로 나눈다. 나는 순도 90% F 인간으로 화도 많고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다. 그에 반해 남편은 지극히 T 인간이다.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행동하는 AI 같달까?
"역시 T는 어쩔 수 없구나!"라는 푸념 섞인 나의 말에도 남편은 "그냥 생각이 다른 거지 뭐." 하며
합리적인 답을 내놓는다. 이런 면에서 T인 남편은 가끔 무뚝뚝하고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나의 남편이 극 F로 바뀌는 상대가 있다. 그건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만큼은 언제나 F인 그.
육아지침서에서 말하는 공감과 사랑의 대화를 보는 것처럼 남편은 아이들에게 늘 다정하고 따뜻하다.
아이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싶어 내가 아이의 선생님을 자처할 때가 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아직 배우는 것보단 노는 것이 더 좋은 아이는 금세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그럼 나는 호랑이 선생님이 되어 아이를 다그치곤 한다. 그리고 '어휴, 역시 가족은 뭘 가르치는 게 아니야.'라고 체념하며 돌아선다.
하지만 남편은 다르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 가며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해 낼 때까지 기다린다.
육아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 기다림이 얼마나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인지 알 것이다.
남편은 묵묵히 기다리며 아이와 함께 해낸다.
우리 가족은 산책을 좋아한다.
날이 좋을 때면 첫째의 손을 잡고, 둘째의 유모차를 끌고 나간다.
아이는 내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을 잘도 찾아낸다.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 줄지어 가는 작은 개미 등 별거 아닌 것에도 즐거워한다. 그 옆에는 어김없이 남편이 동행한다. 흐뭇한 마음으로 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느끼지 못했던 '아빠의 다정함'이 이런 걸까? 짐작해 보게 된다.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아빠는 없다.
아빠의 얼굴, 목소리, 뭐 하나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가끔은 '나도 아빠가 있었을까?'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에는 아빠가 참 많이 등장하고, 동요 속 아빠들은 하나같이 힘이 세고 다정하다는데 우리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아빠가 태워주는 목마는 어떤 느낌일까? 아빠가 자전거를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어린이날에 아빠랑 놀러 가보고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아빠에 대한 궁금증은 기억조차 없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졌고 다른 친구들과의 비교 끝에 박탈감 마저 느끼게 했다. 나의 이상형이 '다정한 아빠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상형과 결혼했다.
높은 나무를 만지고 싶어 하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주는 슈퍼맨 아빠.
뛰어내리고 싶지만 겁이 나는 아이에게 용기를 주는 믿음직한 아빠.
어린이집 등원을 함께 해주는 다정한 아빠.
내가 바라던 우리 아빠의 모습을 남편을 통해 보고 있다.
오늘 아침 아이의 등원을 위해 현관을 나와보니 어젯밤에 남편이 빨아놓은 우리 가족의 신발이 보였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 쪼그려 앉아 열심히 솔질을 했을 남편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어린 시절 느껴보고 싶었던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 남편은 벌써부터 딸아이의 사춘기를 그리며 딸과 멀어지게 될 날을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기우라는 것을 안다.
아빠의 사랑을 아이가 모를 리 없고 아빠의 다정함과 자상함을 자양분 삼아 아이는 건강한 유년 시절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둘은 자연스레 돈독한 부녀사이가 될 것이다.
커가는 아이를 보며 나의 성장과정을 떠올려볼 때가 많다. 아이가 나와 공통된 경험을 하게 될 때면 반가운 마음에 '아 나도 그랬었지. 그때 참 좋았는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도 있다. 그중 하나가 아빠와의 즐거운 추억이다.
내 아이에게는 있고 내겐 없는 아빠와의 추억.
내 아빠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내 아이에게는 좋은 아빠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나마 좋은 아빠의 모습을 느껴볼 수 있게 해 준 남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