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 새로운 소울의 비전을 제시한 디바
왼쪽부터 2020년작 정규 7집 [ALICIA], 2007년작 정규 3집 [As I Am], 2004년작(스탠더드 버전은 2003년) 정규 2집 [The Diary Of Alicia Keys], 2009년작 정규 4집 [The Element Of Freedom], 2012년작 정규 5집 [Girl On Fire], 2016년작 정규 6집 [HERE], 2021년작 정규 8집 [KEYS], 2001년작 정규 1집 [Songs In A Minor], 2005년작 언플러그드 라이브 공연 실황 앨범 [Unplugged]이다.
많기도 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아티스트들 중에서 일단은 가장 많은 수의 앨범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기다려보라. 더 많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으니... 발매년도 순서대로 이 요망진(?) 소울 디바의 디스코그래피를 짚어나가 보자.
알리샤 키스(Alicia Keys)는 1981년생으로, 1집 [Songs In A Minor]를 발표할 당시 갓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원숙하고 노련한 목소리로 깊은 내공의 소울 음악을 들려주었다. 첫 싱글로 내밀었던 'Fallin'의 도입부를 기억하는가? 'I keep on fallin', in~~and out'하며 시작하는 그 인상적인 도입부 말이다.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알리샤가 데뷔한 2001년은 R&B 음악의 전성기가 거의 저물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90년대 미국에서는 백인 취향에 맞춰진 컨템포러리 R&B가 득세하며 R&B가 점차 팝 음악화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반기를 들며 등장한 네오 소울(Neo Soul)은 '흑인음악의 뿌리', '제대로 된 소울 음악'을 표방하며 디엔젤로(D'Angelo), 맥스웰(Maxwell), 에리카 바두(Erykah Badu) 등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을 배출해 냈다. 하지만 그 역사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문제는 네오 소울의 정신이 너무 깊고 마이너했기에 대중을 폭넓게 수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음악이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했을 결과이다.
알리샤 키스가 등장한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스무 살짜리 소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 기깔나게 들려주는 소울은 네오 소울처럼 진지하지 않아도, 뭇 R&B처럼 가볍지 않았다. 깊고 짙은 소울이지만 팝처럼 아름다웠다. 대중이 원하는 중간 지점을 정확하게 찾아 공략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앞에서 요망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R&B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마치 구원투수처럼 등장하여 멋지게 스트라이크 한 방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미약한 시작에 불과했다.
호재를 타고 연이어 발표한 2집 [The Diary of Alicia Keys]가 그야말로 초대박을 터뜨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초대박의 주인공은 이 앨범의 두 번째 싱글로 커트된 'If I Ain't Got You'이다. 첫 싱글은 'You Don't Know My Name'이었지만, 반응이 미미했는지 두 번째로 저 곡을 밀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것. 1집의 'Fallin'이 보컬 도입부로 충격을 주었다면 이번 'If I Ain't Got You'의 킥은 피아노 전주이다. 그러니까 알리샤 키스는 자기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먼 길을 가게 두지 않는다. 단 1초만에 승부를 보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요망지냔 말이다!
1집과 2집의 성공 이후 개최한 언플러그드 공연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황 앨범인 [Unplugged] 또한 당연히 명반이다. 기존에 발표된 오리지널 버전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편곡되어 듣는 재미가 쏠쏠하고, 기존 곡들 말고도 다양한 장르의 커버곡들도 있어서 이 앨범 또한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알리샤의 성공 신화는 3집 [As I Am]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선주문이 폭발했고, 이번에는 첫 번째 싱글이었던 'No One'에서부터 좋은 반응이 터졌다. 이 앨범에서는 그 동안 R&B/소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직적으로 파고들어가느라 미처 넓히지 못했던 음악적 영토를 이제라도 넓혀 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즉, 장르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뜻이다. 소울의 기조는 유지하되 모던 록이나 컨트리, 어쿠스틱, 무려 틴에이지 팝까지 시도하며 자신을 일정한 틀에 가두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알리샤 키스는 이 3집 앨범까지의 커리어로 사실상 뉴-소울의 여제로 등극하게 된다.
원래 정점을 찍고 나면 이제는 내려올 일만 남은 법. 4집부터의 알리샤는 편안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게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듯했다. 발표하는 앨범들마다 일정 수준의 퀄리티는 유지했지만, 결정적인 킥은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알리샤다웠다. 누가 얘기했더라,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계속 1등하려고 힘주며 살면 언젠가는 꺾인다. 그것도 굉장히 추하게. 어쩌면 알리샤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음악을 즐기며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돈에도, 명예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후기 음악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트랙은 4집의 'Try Sleeping With A Broken Heart', 5집의 'Fire We Make'(무려 맥스웰과 듀엣으로 불렀다), 'Tears Always In', 7집의 'Time Machine', 'Underdog' 등이다. 6집과 8집은 내겐 다소 마이너하게 느껴졌기에 추천 트랙이 따로 있지는 않다.
앨범이 많으니 할 말도 그만큼 많았다. 알리샤 키스는 내게 외국 '앨범'을 본격적으로 듣게 해 준 첫 번째 뮤지션이라는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이다. 그 이전까지는 외국 팝 음악을 들어도 그냥 좋은 몇 곡만 골라서 듣곤 했고, 앨범을 듣는다면 주로 가요만 들었었는데 알리샤 키스 2집을 듣고 나서는 '팝도 앨범으로 들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다. 내겐 알리샤 키스 2집이 팝 앨범의 시작이었다. 되짚어보니 새삼 더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