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진영
소설가 최진영은 1981년생으로, 2006년 실천문학에 등단한 것으로 문학계에 처음 발을 들였다. 2010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큰 존재감을 알렸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최진영의 작품은 바로 <구의 증명>(2023)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작품과의 첫 대면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육체를 뜯어먹는다는 설정이 그야말로 그로테스크와 고어의 끝판왕이었다. 그 분야야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장르이기 때문에 처음엔 '아, 이 작가와는 친해지기 어렵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쩌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2023)을 만났다. 이 이야기는 나무의 신성성을 바탕으로 촘촘하게 연결고리를 만들어낸 작가의 서사 능력이 단연 일품이다. 단 한 사람의 생명만을 구할 수 있다는 모진 운명을 타고난 여자들의 이야기이며, 같은 운명을 풀어내는 각기 다른 방식을 엿보며 사람과 삶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여러 번 읽어보며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최진영에 대한 찜찜한 첫인상을 완전히 뒤집은 작품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 <원도>(2024)를 만났다. 원래는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2011)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장편소설을 얼마간 다듬고 제목을 바꾸어 13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원도' 또한 가혹한 삶을 살았다. 가끔 소설가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렇게 괴로워하는 인물을 창조해 내면서 고통스럽지 않느냐고. 원도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아프다는 걸 넘어서서 몸 전체가 결리는 듯 저릿저릿해지는 것 같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물을 마시고 죽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아버지와 새아버지를 구분하기 위해 '죽은 아버지'와 '산 아버지'라는 용어를 따로 붙여 생각하고, 나중에는 새아버지(산 아버지)가 친아버지이고, 죽은 아버지가 새아버지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고, 어머니는 매일 울고, 그것이 원도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방황하고, 깨지고, 병들고, 죽어가는 삶.
최진영은 <원도>를 내놓기 몇 달 전에 출간한 <단 한 사람>에서 한 사람의 삶이라도 '구해내는' 이야기를 썼다. 하지만 <원도>는 한 사람의 삶이 어디까지 부서질 수 있는지, 그 극한을 실험하는 작품 같았다. 원도의 삶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질문은 '왜 사는가'가 아닌 '왜 죽지 않았는가'이다. 의미가 비슷해 보여도 둘 사이의 간극은 결코 작지 않다.
최진영은 원도의 비참한 삶을 통해 우리에게도 질문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고통받으면서, 나날이 무력감을 느끼면서, 너는 왜 죽지 않는 거냐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질문에 오히려 위로받게 되었다. 그래. 고통받는다는 건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고, 어떤 의미이든 발견하기 위해 치열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반증일 테니까. 원도의 삶이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서 그 삶을 일부러 끝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삶의 시작과 끝은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살아 있으면, 죽지 않았다면, 뭐든 될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사이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자로 하여금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단 한 사람>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작품 <원도>에서도 최진영 작가의 깊은 내공을 유감 없이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결국 나는 <원도>를 통해 최진영 작가님의 완전한 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후에 <쓰게 될 것>(2024), <오로라>(2024), <해가 지는 곳으로>(2017) 등 단편/장편 가릴 것 없이 '최진영' 이름 석 자만 박혀 있으면 무작정 읽고 봤다. 읽으면서 수없이 생각했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 걸까? 타고나는 걸까? 아니면 육체의 한계를 발휘하여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노력하는 걸까?
장편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는 작가가 구축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인 모를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살인과 강도, 강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세계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물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 채로 방황한다. 사람이 사람을 서로 믿을 수 없게 되면서부터 전쟁은 시작된다. 서로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살육은, 강간은 정당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 사랑한다. 지나와 도리의 사랑은 보편적 윤리를 상실한 세계 속에서 오히려 숭고하게 빛난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빛나게 하는 유일한 가치가 바로 사랑이다. 아무리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만이, 몸과 몸을 기댈 수 있는 마음만이 사람을 살게 할 것이다.
반면 <오로라>는 절제된 언어와 정제된 인물로 주제의식을 차분하게 드러낸다. 뭐랄까... 예술성이 강한 독립영화를 보는 것 같달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긴 채 두 달 동안 에어비앤비에서 '살게 된' 주인공(최유진)이 등장한다. 유진은 작품 속에서 '너'로 지칭된다. 유진이 살기로 한 에어비앤비는 원래 친구(오세정)가 살기로 되어 있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유진이 양도받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 동안 강박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으로부터 탈피한 채 유진은 자신을 '오로라'라고 칭하게 되고 '오로라'로서 연기하듯 살게 된다.
유진이 사랑했던 사람은 기혼자였다.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면서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유진은 말한다. 상간녀라는 사회적 프레임을 쓰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윤리 한끗은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다. 이 이야기에서도 믿음이 등장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서졌을 때, (심하게는 전쟁이 일어날 만큼) 어떻게든 균열은 발생한다.
그날 그는 '믿기지 않겠지만' '믿을 수 없겠지만' '믿기 싫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이란 말을 거듭했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너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무언가를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믿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얼마나, 어디까지 믿어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는 경구를 떠올렸다. 믿음은 둘째 또는 셋째구나. 어쨌든 첫째는 될 수가 없구나. 믿음은 사랑보다 슬프겠구나...... 생각하며 믿음, 믿음, 믿음 중얼거리다 보니 믿음과 미움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최진영, <오로라> p.6
이 문단을 읽고 나면 상대방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는 그이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보다 어쩌면 더 깊은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나는 믿을 수 있으니까. 믿고 안 믿고의 자유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는 거니까. 사랑은 이끌리는 마음이고, 믿음은 이끄는 마음이니까.
그리고 나서 최진영의 첫 장편소설집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은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학대와 방치 속에서 아무렇게나 내버려진 주인공 소녀는 진짜 엄마 아빠는 나를 이렇게 때리거나 무관심하게 방치할 리가 없다며, 그들의 곁을 훌쩍 떠나 여기저기 방황한다. 때로는 말 못하는 벙어리인 척하고, 때로는 버려진 아이로서의 진실한 민낯을 드러내기도 하며 교회로, 폐가로, 각설이패로 옮겨다닌다.
소녀는 자신의 여행 목적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바로 '진짜 엄마'를 찾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세상에 대해 정리하며 배운다. 그 배움은 위태롭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영혼과 실존을 부서뜨릴 것만 같아 불안하다. 하지만 어쩐지 독자의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이야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단단해져가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의 아이들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위험한 물건에 손댈까봐, 더러운 것을 밟을까봐 부모는 걱정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툭툭 털고 이 정도야 뭐, 하면서 씩씩하게 걷지 않는가. 아이들의 그런 힘으로부터 부모 또한 배운다. 저래 갖고 세상 살겠나 싶었지만 이러구러 살아가더라고.
그렇게 최진영이 만들어 놓은 여러 세계를 둘러다니다 보니 <구의 증명>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엔 그로테스크하거나 고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엽기의 장막이 홀연히 걷히고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뚜렷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최진영이 그 수없이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외치고 싶었던 한마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어야 한다!'일 것이다. 괄호 밖도 중요하지만 괄호 안이 조금 더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남겨진 숙제가 있다. 세상은 평화롭지 않다. 따뜻하지 않다. 냉혹하고 험난하며 가학적이다. 차별과 소외가 만연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폭력과 유린도 서슴지 않는다. 세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만이 답인 것처럼 사랑할 것이다. 최진영은 그것에 대해 쓰는 사람이다. 아마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가면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사로잡히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최진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것이다. 그것이 그가 내보일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유일한 사랑 방식일 테니까.
그런 최진영이 작년 말쯤 첫 산문집 <어떤 비밀>(2024)을 수줍게 내놓았다. 모든 소설가들이 그럴 테지만, 최진영에게도 '소설 쓰기'는 '삶'과 동의어일 것이다. 첫 산문집의 제목인 <어떤 비밀>은 소설가 최진영이 소설 속에 숨겨놓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밀을 가리키고 있다. 철저히 이야기 뒷편에, 혹은 행과 행 사이에 자신을 숨겨온 최진영이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한껏 드러내어 보였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최진영의 작품들에 몰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의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었다. 그 영혼이 나와 너무도 닮은 것 같아 애달팠고, 세상에서 나만 아파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최진영의 문장은 폭력과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철저히 약자로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병든 넋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소설 속에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현실 속의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그 힘, 그 내공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이 책에 모든 게 다 담기진 못했을지라도, 소설가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나약한) 개인인 인간 최진영의 7할 정도는 담겨 있지 않을까.
전체적인 구성은 절기의 변화에 따라 쓴 편지를 인트로로 배치하고, 뒤에 본문이 따라붙는 형식이다. 편지에 습관처럼 붙어 오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라는 안부 인사가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잘 지내느냐는 인사말의 행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중요한 맥락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인간 최진영의 민낯을 보며 이렇게 대단한 글을 써내는 사람에게도 못난 구석이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구나. 그리고 동시에 그걸 인정하며 보란 듯이 내보이는 용기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최진영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연코 '사랑'이었다. 그가 쓰는 문장의 모든 부분에 사랑이 정성스레 담겨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쓸 이유가 없는 사람처럼, 그는 한 편 한 편 정성스레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담았다. 그것을 응축하고 집약한 결과물이 바로 이 첫 산문집인 <어떤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진영이 아주 조금 열어둔 문틈 사이로 슬그머니 한 걸음 내딛어 보니 가장 궁금했던, <구의 증명>에 관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구의 증명>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대답한다.
"그 소설은 '사랑과 한번 싸워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사랑이 마냥 행복하고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이라면, 사랑이 언제나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그렇지만은 않잖아요. 사랑 때문에 괴롭고 절망하고 지옥을 경험하기도 하죠. 어떤 사랑은 나를 최악의 존재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 때문에 불행해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 뒤 '그래도 사랑하겠다'라고 말하는 게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진영, <어떤 비밀> p.241
그렇다. '사랑이 마냥 달콤하기만 하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인 거야!'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그건 최진영식 화법이 아니다. 최진영의 사랑에는 중요한 전제가 깔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사랑을 둘러싼 세상도 세상이지만,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가진 속성도 마냥 밝지만은 않다. 사랑 때문에 불행하고 사랑 때문에 파멸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사랑한 것에 추호도 한이 없다면 그건 괜찮은 거다. 잘한 거다.
최진영을 읽으면서 잘 쓴 글이 가진 '힘'을 여한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잘 쓴 글은 사람의 영혼을 바꾼다. 상처 입은 영혼에게 다가가 '나도 그랬어. 괜찮아.' 하며 쓰다듬어 준다. 그 손길을 느끼면서 우리는 눈물을 거두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서툴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사랑이 있다. 티끌 한 점 정도밖에 남지 않은 사랑이라 해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는 사랑을 손에 쥐고 있으니, 우리에겐 아직 살아갈 힘이 있다.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