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소설가 정보라 - <고통에 관하여>(2023)를 중심으로

by Charles Walker
정보라, <고통에 관하여> (2023)

들어가며


김초엽의 추천사가 옳았다.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생각의 파도에 휩쓸리게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통'에 대한 성찰과 고뇌는 끝을 모르고 달려간다. 우리의 일상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이제 정말 그런지 아닌지도 모를 만큼 우리는 아픔에 무감한 채 살아가고 있다. 삶이 곧 고통이라는 관점에 동의하는가? 정녕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정보라가 4년 만에 야심차게 내놓은 장편소설인 <고통에 관하여>는 그 질문 속에서 탄생한 역작이다.


소설가 정보라는 1976년생으로,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어둡고 마술적인 이야기,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작가이다. 지은 책으로 <저주토끼>, <여자들의 왕>, <아무도 모를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등이 있다. 정보라의 단편집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의 말미에서 정보라는 자신의 목소리로 이와 같은 말을 덧붙이는데, 바로 이 말에서 정보라 작품의 세계관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함께 보자.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로 일이 그렇게 일어난 것이다. 소설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보라의 작품 세계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읽다 보면 현실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단편이든 장편이든 정보라의 작품에는 '경계'가 없다. 성별 간에도, 계급 간에도 경계가 없어서 '넘나듦'이라는 행위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정보라의 소설 속 인물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든다. 그리고 그 녹아듦이 독자로 하여금 이상하게 보이게 하거나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지도 않는다. 실로 엄청난 설득력이다. 소설 속에서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난 것처럼 독자가 보았다면(느꼈다면) 정말로 일이 그렇게 일어난 것이다. 그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작가가 그리는 대로 그 손길을 믿고 따라가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진짜' 현실에 대한 서늘하면서도 예리한 통찰을 깨닫게 된다.


오늘은 정보라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오직 <고통에 관하여>에 관해서만 논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보라의 많은 작품들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고 있 책의 제목을 기억하는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다. 2023년에 읽었던 책이 무려 120권 정도 되는데, 그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작품이 바로 이 <고통에 관하여>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 보자.



왜 '고통'인가?


정보라는 2018년 미국 새너제이(San Jose)에서 열린 SF 관련 행사에 참가했을 때 통증과 진통제에 관한 대담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미국 사회는 중독성 강한 진통제 사용과 관련하여 심각한 사회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당시 대담에 패널로 참여한 현직 의사, 간호사, 약사 그리고 만성통증 환자, 이렇게 네 사람 모두가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된 환자를 병원에서 관리하는 편이 낫다는 데 매우 강하게 동의하였고, 이 모습에 작가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의 모습을 약간 언급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미국은 마약성 진통제 사용 규제가 매우 강한 편인데, 그러다 보니 전쟁에서 부상당하고 치료 목적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다가 귀국한 참전 용사들이 본국에서는 필요한 약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들은 결국 거리를 떠돌며 어둠의 장막 뒤에서 마약을 거래하거나, 마지막 남은 진통제 한 병을 바라보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단다.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제도라는 이름으로 무턱대고 규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로 돌아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미국 사회의 아픈 민낯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를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밝힌다.


사람이 신체를 가진 물리적인 존재인 한, 배고픔과 피로와 통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픈 사람도 아프지 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아직 늙지 않은 사람도, 장애가 있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모든 인간이 다양하게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원하므로 나는 계속 요구할 것이다.

본책 p.338 중에서


작품 속에는 '고통'을 둘러싼 두 가지 관점이 나온다. 하나는 '제약회사'가, 다른 하나는 '교단'이 각각 내걸었던 슬로건으로, 하나같이 극단적이고 편협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양극화 현상'이라는 개념이 잘 설명해 주듯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한쪽 혹은 다른 한쪽으로 하릴없이 휩쓸려서는 영원히 고통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선택지가 없는 삶,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제약회사가 본 '고통'의 의미

- 본책 p.27~29에서 발췌하여 재구성


제약회사는 통증에 대해 '몸이라는 기계의 이상을 알려주는 신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다. 고통은 문제이며,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찾아야 하고, 원인을 찾는 즉시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제약회사는 '고통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만성 통증을 없애주는 약을 개발하였고 사람들은 더 이상 통증을 내버려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고통이 없는 삶을 살게 되면 아프지 않게 될까? 이 질문이 아이러니하게 들린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이쯤에서 '고통'의 외연을 확장해 보자.


물리적, 신체적 고통만 고통일까? 심리적, 정서적 고통 또한 고통이다. 이는 어린 시절의 '경'과 그의 오빠(항상 아파했던) '효'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 있다.


죽기 전에 오빠는 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오빠의 얼굴은 창백하고 무표정했다.
"너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오빠가 경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어쩌면 어린 경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경을 향해서 남긴 유일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경은 그 말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래서 경은 물었다.
"오빠, 아파? 어디가 아파?"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빠가 걱정된 경은 충고했다.
"약 먹어, 오빠! 약 먹으면 안 아파!"
오빠는 경을 내려다보며 창백하게 웃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경은 오랫동안 오빠를 떠올릴 때마다 후회했다. 그러나 경은 너무 어렸고, 오빠가 겪는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본책 p.59~60 중에서


'효'와 '경'의 부모는 제약회사 대표였고, 두 자녀를 임상 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다. 두 아이들에게 물리적 고통에서 벗어날 선택지는 있었지만, 부모의 학대라는 정서적 고통에서 벗어날 선택지는 '죽음' 말고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효'는 세상을 떠나고, '경' 또한 자살 시도를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왜 '극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느냐 하면, '경'이 자살 시도를 한 그날 제약회사에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나 '경'의 부모가 폭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경'은 죽고자 하여 살게 된 것이다.



교단이 본 '고통'의 의미

본책 p.30에서 발췌하여 재구성


반면 '교단'은 고통이 곧 영혼이자 인간의 정수이고, 고통의 근절은 영혼의 멸절이자 신에 대한 거부이며 구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교단은 이렇게 고통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신도들을 모으고, 단계별로 고통을 배치하여 이를 극복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문하고 폭행한다. 이러한 방식이 '교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전술한 제약회사 부분에서 '경'의 이야기가 메인 테마였다면 교단 부분은 '태'라는 인물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태'는 제약회사에 폭탄 테러를 저지른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인물이다. '태'에게는 '한'이라는 형이 있었고, '홍'이라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그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인물이 있었다. 이 아버지라는 인물은 정서적 흥분 상태에 중독된 사람으로, 항상 미친 듯이 기뻐하거나 미친 듯이 슬퍼하거나 미친 듯이 화를 냈다. 그 중간의 상태를 그는 견딜 수 없어 하였고, 이는 결국 '홍'과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빌미가 된다.


어린 '한'이 "아빠에게 맞으면서도 웃는 착한 아이가 될 거예요"라고 말하며 약을 달라고 '홍'을 조르는 순간, '홍'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집을 나온 '홍'과 아이들을 이 사회는 수용하지 못했다. 쉼터라는 이름의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남편이 찾아와 소동을 피우고, 또 다른 쉼터로 흘러가는 삶의 지리한 반복이었다. 이렇게 계속 정처 없이 떠돌거나, 폭력 소굴 같은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 이외의 선택지가 '홍'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떠돌던 어느 날 '홍'은 '숙박 무료'라는 문구에 혹하여 '교단'에 휩쓸리듯 들어가게 되고, 결국 아이들을 빼앗겨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만나지도 못한 채 청소 용역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럼 '교단'의 신도로 들어간 두 아이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한'은 교단의 충직한 개가 되어 교단이 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행했다. 그것이 정의롭든, 정의롭지 않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한'에게는 교단의 교리가 곧 정의이고, 교주의 말이 곧 법이었다. 하지만 '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태'에게는 교리라는 포장지를 교묘하게 씌워 둔 채 자행되는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기도회 사건'으로 묘사되는 집단 학살을 계기로 '태'는 교단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한'과 '태'를 가르는 지점은 무엇일까? 나는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라고 생각한다. '한'에게는 그 점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함께 폭력을 겪었고 함께 도망치고 함께 교단에 들어가 같은 경험을 공유한 동생 '태'에게는 일말의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그 일말의 무언가가 '태'로 하여금 다른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태'는 폭탄 테러를 저지르며 살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경'에게 말한다. 누군가를 죽일 목적으로 폭탄을 터뜨린 게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경'의 부모가 죽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고'였다고 말하는 방식이다. 궤변에 불과한 그의 말을 들으며 '경'은 이렇게 말한다.


넌 왜 안 죽었어? 같이 죽지, 넌 왜 리모컨 들고 길 건너에 숨어 있었는데?

본책 p.97, '경'이 '태'에게 한 말


'경'의 말을 듣고 '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폭탄 테러로 제약회사를 터뜨리자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만 같았던 '태'에게 '경'이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겁하게 숨어서 나를 지키고 남을 파괴하는 인간으로 남는 것 말고, 나의 신념을 지키면서 악의 근원과 나 자신을 함께 소멸시키는, 조금 덜 비겁한 선택지 말이다. '경'의 말을 듣고 '태'는 공감한다. 이렇게 '태'는 '경'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경'의 사랑은 다른 곳을 향해 있는데...



마무리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런 여담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수전 손택의 대표 저서인 <타인의 고통>을 읽었을 때에도 텍스트보다는 책의 초입에 제시되었던, 고통받는 타인을 담아낸 사진들이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다소간 죄책감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기억나는 구절을 말해 보라고 하면 한 마디도 하지 못할 거면서, 매체 특성상 자극적일 수밖에 없는 사진으로만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는 나의 모습이 그리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 나부랭이일 뿐인 건가? 자극적인 것만 기억하고, 불편한 건 본능적으로 멀리하려는 게 인간의 본성인 건가?


그래서 이번 <고통에 관하여> 리뷰를 정성들여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조금이라도 못난 자신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칼로 한쪽 팔이 베이는 남의 고통보다 종이에 내 손가락 베이는 고통이 더 큰 법이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공감하거나 이해하거나 느낄 수 없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더 나아가 당신의 눈앞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폭력에 대해 남의 일처럼 눈감아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조금 더 나의 고통에, 또 남의 고통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고통의 코너에 몰리는 사람들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보라의 시선은 오직 약자들을 향해 있다. 사회라는 범위 바깥에 있는 존재들, 보편성이라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존재들, 선택지가 없어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존재들 말이다.


늘 궁금했던 부분인데, '맞고 틀리다'라는 건 도대체 누가 결정하는 걸까? 그저 '다른 것'뿐이지 않을까? 물론 '나는 그저 남들과 다를 뿐이야'라며 사람을 해친다거나 하는 끔찍한 중범죄를 저지른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렇게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서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존중할 수 있는 미덕을 발휘한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은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이건,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이건 개인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서로를 존중하기 위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몫만큼 가치를 발휘하며.


어쨌든 <고통에 관하여>로 제법 긴 글을 써 보았다. 정보라의 작품은 이렇게 장편소설도 참 좋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같은 단편소설집도 정말 좋다. 단편에서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정말 장난 아니다. 정보라 단편이라면 아마 믿고 읽어도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며 이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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