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은 공양미 삼백석 나는 월급 이백 part1
우리나라 고전 소설 중에 심청전이 있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이겠으나 잠시 해본다면 효심 가득한 심청은 부처님께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라는 말에 자신을 뱃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재물로 하여 인당수에 빠지게 되는데 그리고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결국 아버지는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효(孝)라는 그것에 집중한 채 감동을 되새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런지 조금만 생각을 비틀어 보자.
하나, 일찍 어머니를 잃은 어린 여자아이와 눈이 보이지 않은 장애인인 아버지가 겪는 삶은 어떠했을까? 둘, 지금에서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그런 일들이 없지만 뱃사람들에게 있어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으며 이를 감당하는 일 역시 결국 사회적 약자의 몫은 아니었을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일단은) 그렇게 본다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지독히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루, 하루 힘들게 살아갔던 다수의 사람이 삶 속에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아니 좀 더 비극적(悲劇的)으로 바라본다면 사회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효심 깊은 그것이 아닌 사회 극빈층으로서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일. 그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그리고 앞으로 계속 해 나갈 나의 이야기들 역시 이렇다 저렇다 하며 다양한 이유와 상황을 갖다 붙이지만 결국에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냥 그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거 말이다. 이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아들이 그것도 막내아들이라고 한다는 일이 청소 용역 업체의 그것이요. 당시 월급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백만 원 미만이었던 듯한데 이러한 나의 첫 직장생활이 어머니 보시기에 그렇게도 애처로워 보였을까? 당시 고시 준비로 집에 있었던 형님의 친구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국내 모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급여가 이백은 족히 된다는 말을 들으시곤 동생 좀 어떻게 해 줄 수 없느냐는 말 한마디에 나는 어물쩍, 어물쩍 다니던 곳을 떠나 새로운 직장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 8~9개월은 부사수로 일을 하며 사수를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부사수로 이렇게 오래 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때 이미 나에 관한 판단은 결정이 난 것이었을 수도 있는데 눈치가 없었던 나는 그냥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일을 다녔는데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다른 팀 매니저로 있었던 사람이 나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재는 이런 일(현장직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이 어울리지 않아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해야지’ 그때는 이 말을 들으며 괜히 어깨를 “으쓱”했는데 결국 나라는 사람은 몸으로 하는 일은 어울리지 않아 아니 어쩌면 이곳에서 일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을까?
그러던 중 어느 날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하기를 너는 돈 좀 벌었겠다는 말을 들었고 이때만 해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의미를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좀 더 빨리 그만 두었으려나~!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도 3년 시간을 더 버티며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이제 그 시간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보려고 한다.
한번은 외사촌 결혼식 어머니를 모시고 가게 되었다. 이때에만 해도 자동차가 없었던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가는 경조사였던 듯하다) 어머니께서는 자존심이 상하셨을까? 아니면 친척들 보기에 민망하셨을까? 모든 예식이 끝난 후 다른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볼일이 있다며 두어 정거장을 걸어온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집으로 왔으니 말이다. 그 일 이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를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일하는 선배를 통해 단돈 50만 원에 중고차를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50만 원짜리 차라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참 그것이 말도 안 되는 것인데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 데 필요하다고 하자 자신도 고향에 어머니가 있는데 결혼 후에는 신경을 잘 쓰지 못한다며 흔쾌히 준 것이다. 자신도 이번에 차를 바꾸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당시에 같이 있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사람은 회사에 다니는 이유가 차를 구매하였고 그 값을 갚기 위해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 갚았는지 어느 날 문득 그만두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위와 같은 사람도 있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이 타던 차를 단돈 50에 샀다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좀 그래 보였는지 “수군수군”
하지만 그때는 젊어서였을까? 참 정신력(Mental)이 강했던 것 같다. 누가 무엇이라 하던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난 그 차를 가지고 어머니와 함께 다녔다. 집안 경조사는 물론이거니와 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4~5월에는 봄꽃을 그리고 10~11월 단풍 구경을 하며 10년가량을 보냈고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와 하기로 했던 일들을 네가 다 한다며 좋아하시면서도 어딘지 모를 슬픈 표정을 지으시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