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최고 스코어를 위하여_J
매주 텔레비전으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을 챙겨 봤다. 심지어 기다렸다. 시작부터 끝까지 보려면 밤 10시부터 두 시간 반 정도 과감하게 시간을 써야 했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한밤중에 초콜릿을 까먹고 위스키를 홀짝이면서 끝까지 관전했다. 준결승과 결승 무대만 남은 시점, 1위의 영광을 갈망하고 있을 도전자들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가수도 아닌 내가 참가자들의 무대를 볼 때마다 감정이입 하게 되는 건 왜일까. 음악을 즐겨 듣지만 트로트를 선곡하는 일도 거의 없는데 말이다. 아마도 생애 전성기에 대한 열망 같은 걸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생의 봄날을 그리는 마음 같은 것. 생을 크게 사계절로 구분할 수 있다면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 봄을 맞지 못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거나. 참가자들은 경연을 통해 무명에서 유명이 되거나, 다시 유명해진다. 외롭고 힘들었던 지난 시절을 딛고 사랑받고 기대받는 새 시절을 시작한다. 마침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맞고 싶은 마음, 혹은 되찾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화양연화 말이다.
처음엔 '라베'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겨울 초입, 처음 실내 연습장에 발을 들였을 때 회원 등록 홍보 문구에 따라붙어 있던 '봄 라베 찍으세요!'라는 말. 그저 좋은 말이겠거니 하면서도, 무슨 말일까 궁금해하면서도, 당장 뜻을 찾아보진 않았었다. 골프에 막 입문한 처지에 라베가 뭐든 내가 그걸 찍을 것 같진 않았던 거다. 하지만 일단 발을 담근 영역에선 호기심이 자라난다.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듯, 어드레스와 샷을 어떻게 하는 건지 하루하루 알아가면서 비로소 '봄 라베는 어떻게 찍는지'가 궁금해졌다. 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라베'를 검색해 봤다. '라이프타임 베스트 스코어'(Lifetime Best Score), 그러니까 생애 최고 점수를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나와는 거리가 멀다. 봄에 필드에 나가더라도 골린이로서 얻은 라베가 나의 라베가 된다면 그게 정녕 좋은 일일 수 있나. 나는 ‘봄 라베를 찍지 않기로’ 마음먹고 라베에 관심두지 않았던 초심으로 돌아가 연습하고 있다.
다만 뜻을 알고부터는 라베라는 말이 종종 떠오른다. 과연 내 앞날에 라베와 흡사한 인생 최고의 순간이 있을지, 있다면 언제일지가 한없이 궁금하다. 혹시 이미 지나가버린 건 아닌지 가끔은 두려운 마음도 든다.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여기면서도 여전히 불투명한 진로 앞에서 나는 요즘 자신에 대한 의심과 기대 사이를 수없이 오가는 중이다. 일상은 무기력과 희망이 한없이 뒤섞여 있다. 밤늦도록 노래 경연 프로를 보고, 한낮에 골프 연습장에 가는 내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십 수년간 회사에 바쁘게 매여 있었을 때의 나는 그러지 않거나 그러지 못했다. 좋기도 하고 좋지 않기도 한 감정들로 꽤 자주 마음이 복잡한 걸 보면 나는 지금 방황하고 있나 보다. 이 방랑의 끝과 또 다른 시작과 그 후의 성취와 기쁨 같은 게 몹시도 궁금하다. 나는 지금 나의 라베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는 게 맞을까.
라베라는 말에는 애수가 깃들어 있다. 꿈꾸면서도 서글픔이 인다. 정점에 이르면 다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만사가 이 이치를 비켜갈 순 없다. 삶에서 끝없는 등반은 없다. 그래서 라베의 순간은 가장 슬픈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위로가 되는 건, 생의 마지막까지 꿈을 갖는 한 적어도 최고의 순간이 남아있을 거라고 믿을 수는 있다는 거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 “오직 돌아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지금 당장은 일어난 일의 의미를, 행복의 크기를 채 알 수 없다. 사는 일에 욕심 많은 나는 아마도 사는 동안 나의 라베를 끝없이 그릴 것 같다.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 때문은 아니다. 끝까지 설레며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해서다.
스포츠 심리학자 밥 로텔라가 쓴 ‘내 생애 최고의 샷’에서 팻 브래들리의 일화를 읽었다. ‘백인 타이거 우즈’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 프로 골퍼 키건 브래들리의 고모가 팻 브래들리. 1980년대 대표주자로 LPGA 4대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한 ‘커리어 그랜드 슬래머’이자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일원이다. 로텔라 박사는 팻이 “모든 메이저 대회를 석권하고 싶고 명예의 전당에도 오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한 날을 회상했다. 1991년, LPGA 명예의 전당 입성 축하 파티에 참석한 로텔라 박사에게 그녀가 했던 말. “박사님, 우리는 새로운 꿈을 찾아야 해요. 아침에 일어나야 할 새로운 이유가 필요해요.” 총 6개 메이저 대회 우승을 포함해 LPGA 투어 통산 31승을 거둔 선수에게도 늘 새 하루를 위한 새 꿈과 목표가 필요했던 것이다. 꿈은 실현되는 순간 기쁨과 슬픔을 함께 준다. 옛 꿈이 끝나면 새 꿈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다시 생을 여행할 이유가 생긴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다음 샷을 생애 최고의 샷으로 만드는 것뿐”이라는 책 속 문장에 마음을 읽힌 것만 같다. 다음 샷이 생애 최고의 샷이라고 생각하면 기쁨이 연장되고 슬픔이 유예된다. 비로소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The journey is the reward)는 금언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지나서야 지난 경험들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스티브 잡스가 가장 좋아했던 말이기도 했다.
영화 ‘내 생애 최고의 경기’(2005년)를 봤다. 1913년 US 오픈에서 미국 아마추어 프랜시스 위멧이 영국 챔피언 해리 바든을 꺾고 우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골프 영화다.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기는 꿈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 골퍼였던 바든은 가난한 평민의 아들이었던 위멧의 우상이었다. 스무 살 자신보다 두 배쯤 더 산 롤모델을 넘어서는 순간을 맞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로선 아직 쉽게 짐작하기 힘들다. 막연히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때가 있다는 것과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일일 테니까. 물론 바든은 그다음 해까지 ‘디 오픈 챔피언십(브리티시 오픈) 6회 우승’(1896년~1914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는 그립 방식 중 하나인 오버래핑 그립(일명 ‘바든 그립’)을 대중화한 전설적 골퍼로 남았다. 위멧 또한 ‘아마추어 골프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하면서 상류층 스포츠였던 골프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바든과 위멧 모두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 돼 있다. 어떤 화양연화는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어느 날 라베의 순간이 온다면…… 기억하기 쉬워서 쉽게 그리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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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어쩌다 골프' 1화부터 보기 :)
https://brunch.co.kr/@waytogominji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