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하게 그려라_J
상아색 조각상이 막 생명을 얻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피그말리온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보드랍고 뽀얀 살결을 가진 여인에게 피그말리온이 키스한다. 그녀의 이름은 갈라테이아, 피그말리온의 손끝에서 탄생한 조각상이다. 피그말리온은 너무도 아름답게 빚어낸 자신의 작품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갈라테이아 같은 아내를 얻기 바라는 그의 염원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신이 화답했다. 피그말리온 신화를 그린 그림을 보노라면 기대가,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일을 꿈꾸게 된다.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이 1890년에 그린 '피그말리온과 갈타테이아'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직접 보고 싶다. 수년 전 출장길에 들르자 나오기 바빴던 메트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늘 아쉽다. 몇 날 며칠쯤 들락거리며 느긋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그림 :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장 레옹 제롬, 1890년)
신화에서 유래된 '피그말리온 효과'를 나는 신봉한다. 긍정적 기대를 걸면 실제가 되는 '자기충족적 예언' 말이다. 물론 현실에선 조각상이 사람이 되는 일 따위가 일어날 리는 없지만, 좋은 쪽으로 자기 암시를 반복하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고 산다. 최소한 생각이 걸맞은 행동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효과가 있다. 예컨대 선생님이 긍정적 기대를 건 학생들이 더 뛰어난 학업 성과를 보였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가끔 강사로서 글쓰기 수업을 할 때면 나는 전략적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노린다. 피드백할 때는 장점을 적극 칭찬하고 발전 가능성에 주목해 큰 기대를 드러내는데, 수강생들로 하여금 노력을 배가하게 하는 효과가 확실히 있다.
골프 연습장에서 나는 가상 잔디를 누빈다. 스크린 속 페어웨이와 홀컵을 보며 연습하는 것이기에 따지자면 마음의 눈으로 갈라테이아를 사랑한 피그말리온과 처지가 비슷하다. 필드에 나왔다고 상상하고, 볼을 페어웨이로 보낸다고 상상하고, 스윙할 때 동반자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한다. 연습할 때도 현장감과 긴장감을 갖고 실전처럼 해야 막상 실전에 임했을 때 연습처럼 편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다. 물론 누가 지켜본다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부담이 생겨 오히려 샷이 꼬일 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실력이란 압박 속에서도 발휘돼야 하고, 전략은 마치 그림처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요즘은 특히 어프로치 연습을 할 때 시각화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샌드웨지로 20미터 떨어진 홀컵에 볼을 넣어야 한다면, 일단 머릿속으로 볼이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는 게 우선이다. 마침내 비거리 맞추기에 성공했을 때 스윙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나름대로 감을 익혀 반복 연습하는 것이다.
요즘은 연습장에 가지 않는 시간에도 골프 생각을 많이 한다. 골프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건지,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점점 더 잘하고 싶어지는 건지 선후는 모르겠다. 어쨌든 베스트셀러 작가로 환영받는 나를 그리는 것처럼, 동반자들로부터 "굿 샷" 소리를 듣는 내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골프 책을 읽고 골프 영화나 영상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도 많아졌다. 예전에 K가 사둔 책 '타이거 우즈'도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제프 베네딕트와 아먼 케티언이 함께 쓴 일종의 전기다. 실존 인물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는 매력 때문에 특히 전기류를 좋아하는 편인데 골프 입문자로서 타이거 우즈 얘기를 읽으니 어찌나 흥미로운지. 오랫동안 백인들의 스포츠였던 골프의 지평을 넓힌 시대적 아이콘. 그는 10대 때부터 라운드 보다 연습 자체를 더 좋아했다. 타이거가 12살 때 스포츠 심리학자 제이 브룬자를 만나 샷을 시각화하는 방법을 훈련한 얘기도 나왔다. 제이를 만난 후 타이거는 퍼트에 대한 접근을 바꿨다고 했다. "이전까지는 단순하게 홀에다 넣는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홀 주변을 시각화한 후에 퍼트 하는 방법을 시작했다"는 것. 일종의 최면술을 활용했는데 핵심은 완전히 몰두하고 제대로 집중하는 거였다. 생생하게 그리는 것, 시각화는 결국 몰입하는 일이다.
타이거 우즈의 역사적 어프로치 장면을 영상으로 봤다. 2005년 마스터스 4라운드 16번 홀, 이때도 빨간 셔츠 차림이다. 대회 마지막날 꼭 빨간 셔츠를 입고 힘을 얻는 것 또한 그만의 자기충족적 예언인 셈이다. 당시 우즈의 칩샷(Chip Shot)은 거의 마법처럼 보였다. 칩샷은 그린 주변에서 공을 살짝 띄워 굴려 보내는 짧은 샷. 그린에 떨어진 볼이 갑자기 방향을 꺾으며 홀 쪽으로 굴러가 잠시 멈추더니, 마치 연출한 광고처럼 우즈의 후원기업이었던 나이키의 로고를 보인 뒤 홀컵으로 쏙 들어갔다. 정말이지 조각상 갈라테이아가 생명을 얻어 사람이 된 것에 비견할만한 초자연적 광경 아닌가. 과연 우즈는 얼마나 생생하게 그리며 몰입했던 것일까. 그렇게 홀컵으로 볼이 들어가는 장면을 말이다.
*조각상 : '다비드'(미켈란젤로, 1504년)
런던 연수 시절 빅토리아 앨버트(V&A) 박물관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다윗)상을 봤다. 실은 복제품이었다. 5미터 넘는 키의 조각상을 실물 크기로 본떠 만든 것이다. 성서 속 3천 년 전 영웅, 양치기 다윗은 이스라엘로 쳐들어온 필리시테의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질로 무너뜨렸다. 조각상 다비드는 골리앗과의 결전을 앞둔 모습이다. 왼쪽 어깨에 돌 투석기인 무릿매를 짊어지고 있다. 핏줄 불거진 오른손에 아마도 돌을 쥐었을 것이다. 압도적 강자와 맞서 싸울 각오를 다지는 다비드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정확히 맞추는 장면을 그림처럼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이미지 트레이닝, 상상훈련에 한창일 듯한 다비드를 보면서 나는 막대한 에너지를 느꼈었다. 피렌체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다비드 원작은 피렌체에 있다. 힘과 용기가 필요한 어떤 날이면 복제품인 걸 알면서도 넋 놓고 봤던 다비드 상이 머릿속을 스친다. 골리앗을 쓰러뜨릴 만큼의 엄청난 에너지를 갈구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원작을 직접 볼 날을 함께 고대하면서.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파울로 코엘료가 소설 ‘연금술사’에 박아둔 문장이다. 간절히 원하는 건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생생하게 그리다 보면 기대가 현실이 된다 했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입증된 연구결과다. 자, 인생에 기대를 걸자. 골프 할 때도 물론이다. 어프로치 때 생생하게 그리자, 볼이 홀컵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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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어쩌다 골프' 1화부터 읽기! :)
https://brunch.co.kr/@waytogominji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