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죽림헌 Aug 15. 2024

#03,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마음

아낌없이 주는 사랑, 내리사랑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같은 마음을 가졌다.

친정엄마가 내 아이를 돌보면서 하신 말씀이다


내 딸이 소중해서 네 아이를 돌보지 니 자식이 아님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느냐고 하셨다.

.


친정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말을 딱 끊어서 하실 말씀만 하신다. 우리 집 유일한 O형이다

그런 분이 내 아이가 아프고 나서 내가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 와 계셨다.

내가 낮에 근무하고 바로 병원으로 퇴근을 하니 집이 엉망이 되었고 큰 아이를 돌보아야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연년생 인 큰 아이는 둘째 고모님 댁(남편의 둘째 누나)에 맡겼다. 큰 아이가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밝고 이쁜 짓을 하였다. 누구나 좋아할 남자아이였다.


우리 부부의 한 달 월급은 병원비의 일주일치 분도 되지 않았다. 매달 급여 외의 다른 돈이 필요했다

결혼 5년 만에 작은 아파트를 융자받고 매수하였다. 신축아파트였다.

여기도 기막힌 사연이 있다.

큰댁은 동생들이 자라서 독립하면 집값이 비싸니 지금 동생들 명의로 집을 사두어야 한다며 시아버님께

잔금을 부탁하였단다. 아버님은 맞이의 생각이 기특하여 시골농협에서 융자를 받아 주셨다.

아버님이 안된다고 하였을 때, 이미 계약금을 걸어서 취소하면 계약금을 날린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아버님은 융자를 받아 잔금을 치렀다. 그런데 모두 자기 명의로 하였다.

동생들이 나중에 그 집을 달라고 하였을 때, 명의를 돌려주지 않았다. 자기들이 돈 주고 샀다고 하였다

결국 둘째 형님은 돈 주고 그 집을 매수하였다.

우리도 아파트를 살 때 돈 이야기를 하니 입 싹 닫았다.

그리하여 시간강사, 떠돌이 강사하시든 분이 대도시의 변두리지만 집을 5채나 가졌다.

그 지역이 모두 개발되어 귀한 땅이 되었다. 그런 분들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아무 말도 못 하였다. 자기 몫의 집이 있다고 하였는데 찾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아이의 병원비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우리는 일반 생활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줄일 수 있는 것은 다 줄였다.

병원으로 시댁식구들이 차례로 방문하였고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니 한 번씩  채혈부조를 했다

그때 안 사실이다 우리 집안이 모두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아기에게 수혈을 해야 하니 모두 정밀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수혈을 시작하니 수혈이 되지 않았다.

적합판정을 받았는데 수혈을 시작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어 몇 방울 들어가고 

그다음은 아이의 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그래도 차례로 모두 오셔서 혈액을 받아 보관하였으니 다음 날은 다른 가족혈액, 또 다른 가족

이런 식으로 하였다. 모두 거부했다. 혈액은 한번 수혈을 위해 녹여서 열었으면 재사용을 못한다.

어쩔 수 없는 혈액반응이었다. 간호사와 병리검사실 담당의 모두 난감해했다.

혈액원에서 구입한 혈액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받아들이는 혈액이 바로 나의 것이었다. 엄마의 피는 아이가 받아들였다.

수혈이 되었다. 매일 수혈하는 혈액보다 파괴되어 나가는 것이 더 많았다.

그래서 전날 미리 뽑아 둔 나의 피를 다음날 밤 자정에서 새벽 2시 정도 사이에 수혈하였다.

아이의 몸이 가장 안정기가 될 때여서 수혈이 용이하다, 고 하였다.


그러면 자정이 될 때까지 아이옆에서 책 읽어주며, 알아듣지 못하지만 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나이라고 하긴엔  좀, 개월수로 18개월 정도니 어떻게 이해하겠나.

그렇게 앉아 지친 몸으로 책을 읽어주며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린다.

자정을 넘기고 나면 간호사가 혈액을 데워서 가지고 온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꽂혀 있는 수액을 빼고 혈액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혈액을 넣는 튜브가 지나가는 아래에 따뜻한 물을 담은 의료용 용기에 튜브를 담그고 지킨다

혈액이 응고되지 않도록 그렇게 붙들고 앉아 밤을 새운다.

혈액의  온도가 체온과 딱 맞도록 유지시키는 것이다.

물이 차가워지면 다시 적정 온도의 물을 바꿔온다.

다행히 아이가 중환자니  병실 앞에 간호사 라운지가 있다.

그런 이유로 퇴근이 병원이었다. 

병원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옷을 편히 갈아입고 아이 곁을 지켰다.

그날의 모든 검사수치를 읽어 보며 어느 것이 전날보다 나아졌나 나빠졌나 하고 점검하였다.

그때 새삼 배운 것이 적혈구 백혈구의 각 수치와 혈소판, 헤모글로빈  등  구체적인 수치들을  

알게 되었다. 기타 혈액과 관련된 지식이었다. 


사실 이런 일만 겪지 않았으면  필요수치니 정상수치니 관련된 것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는다. 그런 정상 비정상 이런 표시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할 때가 아니니 간호사, 병리검사실, 의사에게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였다.

병리검사실에 계신 분이 참 고마운 분이었다. 상세하게 지식을 전해주었다.

병원은 희귀병 아기가 입원했다고 다른 병동에서도 구경을 왔다.


검사지를 보며 내가 없었던 낮시간의 상황을 점검한다. 

정상의 수치보다 낮아지면 그때부터 불안하였다.

간호사들도 내가 오면 좀 수월해했다. 열이 오르면 찬수건 얼음팩 등으로 아이의 몸을 문지르고

닦아주고 하니까, 또 아기도 내가 오면 좀 웃었다.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었던 것 같다.

말은 못 한다. 딱 두 마디 이모(이 발음이 이상한 발음이다. 소가 울 때 같은 소리다), 그리고 이지만 한다


혈관이 파열되고 하니 혈관 찾느라 얼마나 찔러 되었는지 이마가 머리끝 부분에서 시퍼런 멍이 

이마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호사분들도 얼마나 신경 쓰이고 불안했을 까.

그 하얗던 얼굴은 검붉은 색과 이마에서부터 내려온 푸른 혈관과 혈관이 터진 자국들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 같은 병실의 다른 보호자가 나에게 말했다.

혈액원에서 혈액을 구입해서 하세요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구입해서 했다.

안 들어간다. 그렇게 돈 주고 구입한 혈액 수도 없이 버렸다.

그런 다음이 가족, 그래도 안되어서 내가 직접 나선 것이다. 남편의 혈액은 아직은 채혈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나의 피만 받아들였다. 어미라고 아이도 아는가 보았다.

수유한다고 생각하고 거의 매일 피를 뽑다시피 하였다.

특이한 것은 아이가 울지 않는다. 불편하고 아프면 찡찡거린다.

그리고는 간호사 보고도 웃고 사람들이 말 못 하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 참 잘 웃었다.

간호사들이 너무 좋아하였다. 우스갯말로 너 같은 남자 만나면 바로 결혼한다고 했다.


친정어머니께서 우리 에 들어오셔서 살려고 결심한 것은,

시댁가족들이, 사돈댁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결정하였다.

시아버님 병원에 오셔서 아이보고 혀를 끌끌 차셨다. 기가 찬다는 뜻이리라
병원마당 잔디에서 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 자식 또 낳으면 된다.
집 팔아 병원비 댈래, 퇴원시켜라.


그 말 듣고 나는 불임시술받았다. 아이를 더 이상 못 낳으면 이 아이에게 전념할 수 있다고,

나의 사랑하는 친정어머니는 당신이 가지신 유일한 재산 역에서 보이는 좋은 위치의 요지의 땅을 파셨다.

그리고 나에게 주셨다. 병원비 보태라고. 아이 보는 아주머니는 스스로 나가신다고 하셨다.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딸아이와 둘이 사는 생활보호대상자였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감사하다고 더 이상은 미안해서 안 되겠다고 하며 울고 나가셨다. 내 형편을 알게 되었으니

병원비가 얼마나 큰돈이며 우리에게 큰 부담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아이는 누구의 핏줄인가 굳이 핏줄을 따지는 민족이니 따져보면 시댁 핏줄이다.

여기에도 뒷이야기가 있다. 잘난 며느님 한분이 시어머니에게 부채질을 하셨단다.

아마도 큰 부챗살이 있는 부채였는가 보았다. 큰 선풍기 만한 효과를 내었다

이 사실은 둘째 형님이 말해줘서 알았다. 그런 것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리 집은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친정어머니, 남편, 나, 아이 둘, 우리 가족은 다섯 명이 한 배를 타고 험난한 운명의 항해를 했다.

아이는 더 이상 주삿바늘을 꽂을 곳이 없으면 일시적으로 혈관이 회복될 때까지 퇴원시켰다.

 병원에서 달리 할 것이 없으니 입원비라도 줄이라는 배려일 것이다. 그렇게 입원. 퇴원을 반복하였다.


우리 가족 다섯 명은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  아이가  괜찮아지고, 나의 친정어머니와 남편은 사이가 좋았다.

나는 까칠하지만, 두 분은 사이좋게 잘 지냈다.

사랑하는 나의 친정어머니는 그렇게 나를 사랑해서 한다,며 아낌없이 헌신하셨지만

그 사랑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로 넘어갔다. 내리사랑을 하신 것이다.

할머니가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어머니는 내 아이들에게 하셨다.

그 사랑을 받고 배운 나 또한 그리하였다. 내리사랑이었다.


행복했던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드린다.

 긴 글을 읽으셨으니

나의 이야기 모음집에서 가족이야기를 가져왔다.


이스방, 밥 무라

우리 집 요리사, 셰프인 어머니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아이들과 이스방 술 안주하라고

내가 새로 사 드린 휘슬러 솥에

튀김을 하셨다


이스방~

불러도 안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식탁에서 이미 젓가락 들고 앉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아버지 식사하시라고 해라고 시킨다.


'아버지, 할머니가 식사하시래요'

집안엔 셰프 우리 어머니의 맛있는

냄새가 가득하다.

아이들이 아버지 식사하시래요 라는 소리가 

온 집을 울린다.


한 스푼 보태어

이스방~까지.

행복냄새가 집안 가득했었다.

행복한 기억들이 한가득,

가족의 시간대에도 화양연화의 계절이 있다.

#친정어머니 #사랑 #병원비 #수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