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의 원망과 가슴의 비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치유의 날들 중 이유없이 부지불식간에 공격 받았기에 한평생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도 집안식구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을 쓰 보았다.
"니 월급 얼마 받노"
"7만 원 정도 받는데요".
그때는 입사 후 그래도 수해가 흘렀다. 사실 7만 원 되지 않는다.
그것을 세세 콜콜하니 6만 몇 천몇 백까지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에 그냥 7만 원 정도라고 말했다.
그때 나에게 돌아온 그녀의 말은
"그 돈 벌려고 아이 두고 나가나"였다.
가슴에 비수가 꽉 꽂혔다, 그것도 치유가 되지 않도록 깊이 꼽혀 한평생을 가지고 산다.
그때는 결혼한 지 5년 정도였으니 나도 비수를 꽉 꽉 꽉 꼽을 수가 없는 년수다. 입지가 그렇다.
나는 분한 마음을 속으로 삭였다.
지는 뭐 남편이 국립대 전임 강사라라서 돈을 많이 버나 보지 겨우 보따리강사, 시간강사 하다
이제 전임 강사되었으면서 속으로 생각하며 씩씩거렸다 코로 뜨거운 김이 나온다. 머리에서도 나온다.
이런 걸 두고 뚜껑 열린다고 하는가 보다.
모두 공무원이라는 점은 같은데 전임강사라면, 공시보고 몇백, 몇천 명 중에서 들어간 사람으로 치면
서기보 시보, 서기, 주사보 시보, 주사보, 주사(6급), 사무관 도 됐어락 말락 직위도 없으면서 시간강사하는
동안 시댁에서 끊임없이 가져다 모두 부모 돈으로 살면서, 보따리강사 시간강사 돈이 얼마 된다고 직업도
안정되지 못하였을 땐데, 하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3대 고시를 치르고 된 것도 아니면서 그리고 속으로 참 불쌍하다 생각하였다.
조교부터 시작하는 동안 아내는 직장도 없지 아기는 낳았지 어떻게 생활하였을까,
시댁에서 먹을 것 다 가져다 먹고 돈 필요하면 융자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니 얼마나 시댁에 잘 보여야
할까, 최후에 상속까지 생각해야 했으니 그러니 갈 때마다 논바닥, 밭고랑에 엎드려 죽어라고 일하고
집에 돌아갈 때는 바리바리 싸서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간다. 시골에 노부부만 있으니 일도와 준단다.
그렇게 하여 시골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살면서 정당하게 시험 쳐 공무원 되고 은행원 되고 교사
되어 열심히 직장 생활하는 여성을 비하하고, 병원비 때문에 직장 생활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그 돈 벌려고 아이 놔두고 나가나' 사람의 인성문제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당사자는 죽고 없어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의 분함을 억울함을 기억한다.
우리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본 데없이 자라서 그렇다> 모든 것을 손익계산의 시선으로 보니 그렇다.
어쩔 수가 없다. 고 하셨다.
여기서 본 데란,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 소중한지 가치기준도 포함된다.
그 말은 폐부를 찌르는 생각 없고 잔인한 말이었다. 명색이 앞으로 교수부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저급하고 상식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막말을 내뱉는 사람처럼 입에서 독을 품어 내었다.
아마 그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한다. 인간답지 못하고 욕심만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차올라서는...
두 얼굴에 가면을 쓴 사람, 아니 얼굴이 몇 개 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항상 하는 말이었다.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아무도 못 당한다고 하였다. 계략과 모사가 뛰어나서.
이제는 없는 사람이니 입으로 뱉는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도 문득 그때 생각이 나면 이제는 운전하며 욕을 한다.
얼마 전 블랙박스를 교체하며 아차 하였다. 녹음이 되었겠구나.
뭐 어떠랴 혼자서 한 푸념인데... 자주 리셋하면 되지,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친정에서는 욕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 할머니께서 조선시대 고루한 양반집안 출신이시고
양반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일제 강점기에 집안만 보고 조혼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 할머니 앞에서 하나뿐인 손자가 밖에서 욕을 배워 왔을 때 할머니께서 손등과 발등에
쑥뜸질을 하였다. 정말 쑥 뜸질 많이 하셨다. 지금 같으면 아동학대라 할 것이다
히피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밤에 조용히 들어가셔서 머리카락을 썩둑썩뚝 자르셨다고
했다. 한 밤중에 날벼락을 당했다고 했다.
그런 엄한 할머니 앞에서 감히 욕이나 험한 말은 있을 수 없었다. 용납되지 않는다.
또 어디에 쑥 뜸질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야 워낙 할머니 품에서 살았으니 괜찮았다
그런 내가 차 안에서 운전하며 억울한 일 분한 일이 떠오르면 욕을 한다. 뻔한 거지만,
나한테 한 것 너에게 그대로 돌아가라 이 대에서 안되면 다음 대로도 가라, 그렇게 푼다
이건 독설이다, 잔잔한 독설이다
내가 입사했을 때 나의 급여는 4만 원이 조금 넘었다,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이돈 받으려고 공부시켰나'하셨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은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세상을 앞서고 계셨다. 급여 적다고 사표를 내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여자라고 집에서 아이만 키우고 살림만 살아서는 안된다. 능력이 되면 직업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돈 쓰지 않으시고 차곡차곡 계를 넣어 주셨다.
그때는 계붇는 것이 돈이 빨리 모였다.
결혼하고 아이가 아팠을 때는 내 급여 5만 원과 남편의 급여를 합쳐봐야 10만 원 조금 넘는다.
아이의 병원비, 헛웃음이 나온다 이제는, 일주일 50만 원, 검사비 따로 수혈을 위한 혈액구입비
따로 약은 수입약, 우리나라에 사례가 거의 없고 약을 개발한 제약회사가 없었다.
그래서 원무과에 선납을 해야 검사, 투약, 치료, 수혈이 가능했다.
두 사람의 1년 치 급여를 몽땅 틀어 넣어도 한참 모자란다.
공무원 의료보험 꼬박꼬박 두 사람이 넣은 것은 아무 소용없었다.
보험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입원실비, 식대, 수액 뭐 그 정도였다. 그것도 100%가 아니었다.
거의 본인 부담금이다.
그렇게 아이의 병은 나를 경제적인 고통 속으로 이끌었다
지금은 참 좋아졌다. 의료보험 혜택이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몇%이냐의 차이다 물론 지금도
비보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의 병이다 우리는 의료제도를 끊임없이 발전시켰다.
그녀는 그렇게 힘겹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에게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말의 비수를 꽂았다.
그때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다.
그 이후도 그녀의 만행은 쭉 이어졌다.
알게 모르게 묘하게 분위기를 만들어 가며 찌른데 또 찌른다.
나 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댁 갈 때마다 최상의 것을 시댁에 가지고 가는 나와 달리
그녀는 돈을 아끼려고 그런지 시간강사의 경제적 여건 때문에 그런지 시골5일장에서 싱싱하지 않은
허접한 재료들만 사가지고 왔었다. 그런 것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는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시아버님께서 농협에 융자라도 받아서 우리에게 줄까 봐 노심초사했는지도 모른다
자기들이 장남이니 자신들의 몫이 나갈까 봐 그랬는지도 모른다.
둘째 시숙이 사업하시다가 어려움을 겪을 때 시아버님께서 시골농협에 융자를 받아
둘째 시숙에게 주었다. 이후에 둘째 형님은 시댁에서 숨도 못 쉬고 살았다. 둘째 시숙이
제때 은행에 돈을 상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며느리들을 모두 모아놓고 절대 돈 빌려 달라고 해도 빌려주지 마라, 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왜 본인이 하는지, 시어머니와 둘이 앉아서 하였다.
둘째 형님도 지금 나처럼 차에서 욕하고 사실까. 둘째 형님네는 외국에 사신다.
기가 막히게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뛰어난 연기자였다. 뛰어나 연출가였다. 다른 가족이 있을 때는 무척 선하다.
뛰어난 계략과 모사꾼이었다.
너무 늦어 지금 혼자서 욕하고 있다. 그녀는 비수를 수도 없이 꽂았지만 나는 지금 혼자 구시렁거린다.
가급적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독이 되는 말의 비수를 날려서는 안 된다.
이제 늦었지만 이렇게라고 풀어내고 이 말의 원망은 그녀가 받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이 글들을 쓰고 나면 훨훨 날릴 것이다.
가거라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거라!
<그 돈 벌려고 아이 두고 나가나>
#비수 #급여 #잔인한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