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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낭비한 듯한 기분이 들 때

(6) 정동진

by 박지아

❚ 5인 미만 출판사만 골라다닌 '마이너 인생'


"나는 10년을 길거리에 내다 버렸어."


10년 만에 만난 대학 후배는 을지로의 어느 파인다이닝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돈을 주 소재로 한 자그마한 식당인데 술도 종류별로 다양하고, 음식 맛도 기가 막힌 곳입니다. 붉은 조명이 고요히 밤을 물들이는 그곳에서 10년 만에 대학시절 지도교수님도 뵈었고, 두 명의 후배들도 만났습니다.


이 두 명의 후배들이 제 속을 긁었습니다.


글쎄, 자기계발서로 유명한 S 출판사 편집자들이더군요. 제가 지금 몸담은 출판사도 명망 있는 곳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엔 직급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두 후배 중 하나는 벌써 대리라고 하더군요. 명함이 없냐고 묻길래, 그냥 "명함은 안 가져 왔어."라고 둘러댔습니다.


저도 대리입니다.


편집자 경력 10년 차에 '대리'라니 무능하고 한심한 노릇이죠.


워낙에 5인 미만 작은 출판사를 전전했던지라, 직급이랄 것도 뭣도 없는 커리어를 쌓긴 했지요.


작은 회사야, 대충 불러대면 직급입니다. 팀이 없어도 팀장이고, 부서가 없어도 부장입니다. "편집팀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라고 저자들에게 말해 두지만, 그 편집팀은 지구에 없어요. 그 출판사에 편집자라고는 저뿐인데 무슨 팀이 있겠습니까.


가끔은 이런 말도 합니다. "디자이너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디자이너 없어요. 제가 디자이너입니다. 인디자인,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다 편집자인 제가 합니다.


가끔은 기자도 하고, 가끔은 교사도 하고, 가끔은 인솔자도 하고, 가끔은 행사 보조나 사회자도 합니다. 원래 5인 미만 출판사는, 이렇게 굴러가는 겁니다.


이것저것 다 잘한다고 해야 할지, 전문성이 없다고 해야 할지.


그렇다 보니 이력서에 쓸 직급이 없어서, 죄다 '사원'이었습니다.


이 한심한 인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다 입을 뗐습니다.


"나는 10년을 길거리에 내다 버렸어. 이게 진실이야."

▲ 을지로 파인레스토랑 <저돌>에서. 앞으로 잘 보여야 하는(?) S 출판사 거물 편집자 둘이 있었다.


❚ 그래, 다 때려치우고. 정동진으로.


1년 전 일입니다. 저는 3일 만에 회사를 때려치운 적이 있어요. 예수님도 부활하는 데 3일이 걸리셨는데, 제가 사표를 인쇄하기까지는 채 3일이 안 걸리더군요. 10년 차인 저를 사원으로 받아주되, 연봉 3,200만원을 주겠다는 근로계약서를 들이밀던 그쪽 팀장에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회사에 적합한 인재가 아닌 것 같아요."

(안 죄송합니다. 너는 양심이 있습니까?)


3월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제부터 봄이라는데, 도무지 봄 같지는 않고, 일주일 후가 생일인데 백수 신세였죠.


당시 성인물 웹소설 연재를 막 끝난 뒤라, 인세로 푼돈이나마 벌고 있었습니다. 오징어 질겅질겅 씹으며 질펀한 19금 씬을 쓰는 데 도사가 되어 있던 시절이었죠. 새로 연재할 작품을 쓰고 있었고, 해외에 떠날 큰 돈은 없고, KTX앱을 붙잡고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 발견한 겁니다.


가자! 정동진으로!


'불쑥'은 아니었고, 마침 쓰고 있던 소설 배경에 잠시 정동진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동진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글이야 사진이나 유튜브를 보고 쓸 수야 있었지만, 창작을 핑계로 도망 치고 싶었죠. 그래서 가방에 노트북 하나 달랑 들고, 값 싸고 양 많은 위스키 한 병 들고 무작정 떠난 겁니다.


▲ 값싸고 맛있는 위스키 '파이어 볼'. 수정과 맛이 난다. 가난한 주제에 물회도 먹었다.


❚ 떠돌이 인생에 낙원은 없었어


이제 막 봄에 들어선, 그러나 아직 겨울의 언저리에 있는 3월의 정동진이 펼쳐졌습니다. 아기자기한 장식이 많은 기차역에 서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지요.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시퍼런 바다, 사나운 파도 소리. 여태껏 제가 맞아 본 바람 중에 부산 댓바람에 가장 거셌는데, 정동진 바람은 더하더군요.


고백하건대, 저는 좀 대충 살았어요.


어느 출판사에서 2~3년 있다가, 힘들면 도망치고. 밑천이 뽀록날 것 같으면 또 도망치고.


애초에 편집자 재질도 아니었어요. 꼼꼼하지도 못하고, 섬세하지도 못했죠. 국어 문법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내내 술이나 마시고 다녔고, 그게 직장생활에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걸핏하면 모던 바, 위스키 바나 찾아다니고, 월급이나마 받으면 어디 놀러 다니고, 남을 부러워 할 자격도, 자기 인생을 후회할 자격도 없는 인간이었죠.


해변에는 커플들도 많고, 다들 행복해 보이고, 세상은 평화롭기만 한데.


홀로 내가 있더군요.


그날 밤은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습니다. 운 좋게도, 성수기가 아니어서 저 혼자 방을 썼어요. 잠은 오지 않고, 토독토독 자판을 두드렸다가 멈췄다가, 몇 줄 썼다가 지웠다가.


우리는 모두 인생의 최전선에 있잖아요.


내 인생의 최전선이 정동진(正東津)이라니.


인터넷에 찾아 보니, 이 지명은 춘분이 되면 해가 이곳의 정동쪽에서 뜬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더군요.


내 인생의 해는 여기서 뜰 것인지, 영영 밤인 것만 같은데.


도망쳐다닌 인생에 낙원은 없고.


절벽, 절벽, 그리고 또 절벽. 그리고 정동진의 거친 파도.


흰 포말이 이는 차가운 밤바다 맛.


아마 제 인생의 맛은 후회인가 봅니다. 정말, 짜게도 쪼그라든 인생이었어요.


▲ 정동진 시간 박물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습니다. 강릉에 가고 싶었거든요. 모래사장을 따라 한참 걷는데, 저 멀리 알록달록한 기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시간박물관'이라고 해요.


저는 드라마 '모래시계' 세대가 아닙니다. 그저 그런 드라마가 유명했다는 것만 알지요. 그래서 대관절 시계와 정동진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랍니다. 그래도 일단 들어갔어요.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 기차 칸을 지나고, 또 지날 때마다 오래된 시계가 한도 끝도 없이 나오더군요.


재밌는 시계가 참 많았어요. 기발한 것들도 있구요. 어떻게 이런 기계를 생각해 냈는지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을 붙잡고자 했던 인간의 아득한 집념이 경외롭더군요.


손 안에 쥔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사라지는 시간이 눈 앞에 시침과 분침으로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딱, 딱.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초침의 소리를 들으며, 저는 일순 무척 피로해졌습니다. 너무 오랜 악몽을 꾼 것 같았어요. 아니면, 아주 길고 긴 동굴 속에 있는 기분이었죠. 무지하게 흘려보낸 지난 시간들이 병마용갱 같은 파도가 되어 저를 덮쳐오더군요.


삼십 하고도 몇 년을 살면서, 도대체 내 손에 남은 건 뭘까요?


그 많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저는 오래된 시계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 그래요.


아직도 시간이 흐르고 있는 오래된 시계.


그게 나였습니다.

▲ 내가 원할 때 시작하면 될까?

❚ 인생 낭비란, 어쩌면 아름다울지도 몰라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건 없단다. 네가 원할 때, 시작하렴!]


기차칸의 끄트머리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더군요. 뭔가 유리병이 머리를 탕, 치는 느낌이었는데 그 순간 너무 깊은 생각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저 <벤자민 바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영화였나, 소설이었나 궁리하면서 전망대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주 멋진 풍경이 나왔습니다.


탁 트인 바다 풍경 앞에서, 그러니 미모가 없어서 셀카는 못 찍고, 그저 비슷한 풍경 사진만 몇 장을 찍어다가 휴대폰에 담았습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아까 본 문구를 생각했어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걸까.


오늘부터, 미래의 어느 순간 내가 내가 시작만 하면 때가 되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낭비한 시간들은 단순히 때가 아니었던 게 아닐까.


그럼 그건 낭비가 아니지 않나?


도움닫기라거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거나. 힘을 모으는 시간이라거나. 그런 이름을 붙일 만한 무언가는 아닌 걸까.


그렇다면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낭비'로 만들지 않기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혼자 어이없어서 웃었습니다. 낭비를 가치로 바꿀 묘수가 있다면, 진작에 했겠죠. 이딴 걸 고민이라고 하고 있는 것인지, 답 없는 생각을 왜 하는 것인지 터덜터덜 정동진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떠나기 전에 정동진 바다를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해변에 걸쳐진 노란 보트 한 척. 1인당 만 오천 원인가, 이만 원인가 적혀 있던 낡은 가격표. 그걸 타겠다고 어수선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 바다와 하늘. 그 사이를 가득 채우는 바람. 햇살. 3월.


여기는 정동진이었죠.


저는 운동화 안에 들어온 모래를 털어냈습니다.


언젠가 이 순간도 인생의 낭비로 기억될까요?


이력서 한 장 더 쓸 시간에 정동진으로 도망친 사건이 어떻게 인생 낭비가 아닐 수 있을까요?


정말로, 인생 낭비라는 건, 퍽 재밌고 아름다운 것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런 낭비로 가득 찬 제 인생도, 어쩌면 재밌고, 아름다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 낭비가 아름답다니. 나 참, 동쪽 끝까지 와서 얻은 깨달음이란, 고작 이런 거였죠. 구제불능의 인간인가 봅니다.


▲ 같이 탈 사람이 없어서 못 탔던 보트.


❚ 10년 낭비했어? 10년 더 살아, 그럼


며칠 전에 SNS에서 재밌는 글을 봤어요.


"1년을 낭비했다면, 1년을 더 살면 됩니다. 우리 모두 건강관리 잘해서 장수합시다."


깔깔 웃었습니다. 그러게요, 1년 낭비했으면 1년을 더 살면 되겠군요. 10년 낭비했으니 10년은 더 살아야겠습니다. 저속노화 식단도 하고, 혈당도 관리하고, PT도 받고.


그날, 을지로에서 후배들에게 기가 팍팍 죽어 돌아온 저는 휴대폰과 노트북을 연결했습니다. 1년 전에 다녀온 정동진 사진들을 정리하며, 이걸 낭비가 아닌 가치로 한번 만들자 싶었어요.


천 원짜리 돈이나 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하게 조회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모아서 자비출판이나 해야 할까. 데이터 쪼가리나 만들고 있구나. 브런치 놈들이 백업도 안 해줄 텐데, 꿍얼꿍얼거리면서도, 기어이 이것도 한 편의 글로 빚었습니다.


어느 3월의 정동진을 자박자박 걸으며.


이 글 앞에 선 저는 오래된 시계처럼 째깍거리며, 또 앞으로 나아가겠지요.


오늘 하루를 딛고서.


가장 아름답게 낭비할, 내 인생의 시간을 찾아.



박지아.

편집자.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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