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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 구려병'을 치료하는 법

(14) 용인 한국민속촌

by 박지아

글쟁이에게 감기 같은 병이 있습니다.


이른바, '내 글 구려병'이죠.




'내 글 구려병'. 이게 뭘까요?


이게 무슨 병이냐면, “내가 쓴 글이 너무 '구려' 보여서, 허접한 글 같아서, 마음이 찢어지고, 고통이 물밀듯 오는 병.” 요약하자면, 자존감과 함께 창작의욕도 와르르 무너지는 병입니다.


아마 브런치 작가님들 중에서도 이 병에 걸린 경험이 종종 있을 겁니다.


사실 글쟁이라면 다 한번씩은 걸려보는 병이지요.


일단 글을 쓸 때는 느낌이 좋습니다. 퇴고도 안 해도 될 만큼 깔끔하죠. 그래서 '발행' 버튼을 꾹 누릅니다.


올리고 나서, 한참 후에 문득 다시 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글에서 이상한 부분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 난잡한 글이 또 없는 겁니다. 갑자기 이딴 글을 독자분들에게 보여주는 게 한심하고 부끄러워지죠. 황급히 수정을 해 보지만, 어째 고치면 고칠수록 문장이 어긋나고, 기승전결의 '아다리'가 안 맞는 것 같고. 표현도 적절치 않아 보이죠.


이럴 때 다른 작가님 글을 딱 보면, "내 글은 쓰레기다!" 싶은 충격이 묵직하게 머리를 칩니다.


글쓰기를 괜히 시작한 것 같고, 무슨 자신감으로 인터넷에 글을 쓰나 싶어지죠.


결국 발행 취소를 누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점점 내 글이 이상하게 보여요. 고쳐도 고쳐도 성에 차지 않습니다. 이게 하루이틀 누적되다가, 결국 슬럼프에 빠집니다. 매일매일 글을 잘 쓰던 사람이 갑자기 손이 멈춥니다. 발행버튼을 누를 수가 없어서 계속 서랍에 쌓아만 둡니다.


그러다가 브런치에 마음이 완전히 뜹니다.


글쓰기도 더 재미없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내 글 구려병'은 절필까지 갈 수 있는, 글쟁이에게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그런데도 이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환절기 몸살 같은 거라, 안 앓을 수가 없어요.


저도 골골대는 중입니다.


아주 죽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어느 해의 여름 이야기를 좀 할까 싶어요.


제가 성인물 작가로 활동하던 때 이야기입니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아주 질펀한 성인물을 쓰겠다고 기획했는데, 아무리 써도 글이 '구린'겁니다.


그래서 조선의 풍경 속에서 영감을 받자! 싶어서 날을 잡고 간 거였는데, 글쎄. 하필이면.


KakaoTalk_20250630_083708648.jpg ▲ 이렇게 비가 내릴 줄이야.


다 같이 쫄딱 젖어선.
불쌍하기도 해라


한국민속촌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이미 쫄딱 망했다는 느낌은 있었어요. 일기예보를 안 보는 성격이라, 그날그날 하늘을 살피고 운에 맡기는데, 이날은 꽝이었죠. 우산이라도 챙겨 온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민속촌 입구에서부터 물이 흥건하게 아주 한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강이 아니라, 그냥 홍수였어요. 길이 싹 다 잠겨 있었습니다. 많이 고인 곳은 발목 위까지 물이 찼죠.


이제 와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입장료가 아까웠어요. 오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렸구요.


"한 번 젖지 두 번 젖겠냐" 싶어서 무작정 빗속을 걸었습니다.


신발 안으로 물이 차올랐고, 모래가 발바닥을 찔러댔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옷은 흠뻑 젖고,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죠. 내일 몸살은 확정이었습니다.


좌우간, 비 오는 민속촌은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여름이었죠.


초가집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빗줄기에 요란하게 혼이 나고 있는 나뭇잎 소리.


풀 냄새. 물 냄새.


오래된 한옥에서 나는 나무 냄새.


비가 내리면 푸른 것은 더 푸르게 보이고, 붉은 것은 더 붉게 보입니다.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무겁게 채웠는데도, 이상하게 세상은 더 밝아 보여요. 탁한 먼지를 싹 걷어낸 듯 공기는 맑고 가볍습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도 발 씻는 물로 보입니다. 몸에 찰싹 달라붙은 셔츠도, 물 먹어서 무거운 샌들도 대충 그러려니 하며 걷게 됩니다.


세상이 다 물에 젖어 있잖아요.


나도 말이죠.


이름 모를 풀이나, 나무나 바위나 민들레나 조롱박이나 외양간 소까지도, 똑같은 쫄딱 젖은 꼴이 됐어요.


글은 안 써지고, 써도 이상하기만 한데, 비나 맞고 다니고.


참, 내 인생, 처량하기도 해라.


어깨가 축 쳐지죠. 돈도 안 되는 글쟁이 인생, 접고 싶어지죠.


KakaoTalk_20250630_083708648_02.jpg ▲ 민속촌에서 만난 소. 이 빗속에서, 너나 나나.


어쩌다가 작가?
정말 질투 나서 죽겠어요


[우연히 작가가 됐습니다.]


[취미로 한두 자 쓴 게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그저 꾸준히 썼을 뿐인데,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첫 작품으로 등단했어요.]


요런 걸 볼 때면, 아주 질투로 치가 떨립니다.


참, 세상엔 참 글재주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따로 글을 배운 것도 아니고, 열심히 쓴 것도 아니라는데, 정말로 문장의 태가 남달라요. 심지어 이야기가 재밌고요. '썰 푸는' 재주를 타고난 사람들이 있어요.


어린애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느꼈죠. 똑같이 가르쳤는데도, 글이 딱 눈에 띄는 아이들이 있더군요. 어떻게 써야 글맛이 사는지, 기승전결이 뭔지 엄마 뱃속에서 배워 나온 듯했어요. 몇 년 배운 어른들보다 낫더군요.


저는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어요.


대학 4년 하고도, 대학원 2년간 문장을 닦았죠. 열심히 썼다고 썼는데, 다 실패했어요. 공모전도, 신춘문예도, 당연히 문예지 문턱도 넘지 못했죠.


대체 뭘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등록금으로 땅이나 샀으면, 지금쯤 부자가 되었을 텐데.


그래도 전공이 아까워서 어떻게든 글로 먹고살겠다고, 뭐든 잡히는 대로 썼죠. 인터넷에 무료로 글을 올리는 3류 성인물 작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물에서라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서도 벽이 보이지 뭡니까?


세상에. '꼴리게' 쓰는 것도 재주였습니다.


질펀한 것도, 여하튼 잘 쓰는 놈이 따로 있더라고요.


아니면, 교보재를 보고(?) 연구를 하든가.


KakaoTalk_20250630_083708648_04.jpg ▲ 흰 무궁화가 싱그럽게 환하다.


'절필'한다는
새빨간 거짓말


비는 그칠 기세가 안 보였습니다.


저는 어느 처마 밑에 앉아 '내 글 구려병'을 생각했어요. 무궁화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데, 제 마음은 시커멓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원, 구리다고 생각할수록 구리더라고요.


솔직히 내가 봐도 내 글이 별론데, 남들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조회수도 안 나오고.


브런치로 치자면, 이제 라이킷도 없고. 구독자도 없고.


이걸 계속 쓰는 게 맞나 싶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싶고. 돈도 안 되는 거, 읽는 사람도 없는 거, 내가 왜 하나 싶죠.


근데, 이러다가 결국 절필을 하느냐?


뒤도 안 돌아보느냐?


아뇨. 그건 아니더군요. 마음속으로 비장한 '절필' 선언을 한 게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돌고 도는 물줄기처럼.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또 글을 썼죠.


어차피 글쟁이 본인도 알아요.


되돌이표 같은 거예요.


'글 따위 다시는 안 쓴다!'라고 하면서도, 그날 밤 딱 침대에 누워서 눈알을 도르륵 굴리면 쓸만한 문장이 머리에서 푱 나오죠. 이걸 어디에 좀 써놓고 싶어집니다. 생각 더 하면 한두 줄 더 나올 것 같고, 하, 이거 좀 잘하면 한 편 될 것 같고? 그러다가 정신 차리면 야밤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또 '발행'을 꾹 눌러요.


그리고 라이킷 올라가는 거 뚫어져라 봅니다.


통계도 한번 눌러봅니다.


한숨 한 번 푹 쉬고, 다른 작가님들 글을 봅니다.


슬쩍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이거보단 잘 쓰겠는데?"


그럼 또 신이 나서 씁니다.


그렇게 '내 글 구려' 하는 생각이 스르륵 사라집니다. 또 한동안 마라톤 하듯이 계속 글을 쓰죠.


정신을 차리면, 완쾌된 상태입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싶어요. 쓰는 게 이렇게 재밌는데.


KakaoTalk_20250630_083708648_12.jpg ▲ 비를 맞는 조롱박들. 어쩜, 이 초록이 이렇게 환한지.


자매품, '내 글 쩔어병'


그렇게 산책하듯 느긋하게, 적당히만 쓸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하나의 복병이 있습니다.


바로 '내 글 쩔어병'이죠.


이건 또 무슨 병이냐? 바로, 내가 글을 너무 잘 쓰는 것 같은 병이에요. 내 글인데 내가 봐도 너무 잘 쓴 것 같은 거예요. 내 글인데도 아주 기가 막힙니다. 객관적으로 전혀 잘 쓴 글이 아닌데, 아무튼 내 눈엔 걸작으로 보여요. 읽으면 읽을수록 진또배기 같습니다.


그럼 또 미친 듯이 발행을 누릅니다. 하루 한두 편씩 막 나와요.


그렇게 쭉쭉 쓰면, 차라리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나만의 낙원에 갇혀 쓸 수 있으면 정신은 쾌적하지 않을까요?


발을 헛디디듯이, 홀랑 또 '내 글 구려병'에 걸립니다.


이렇게 '내 글 구려병'과 '내 글 쩔어병'이 번갈아 오는 게, '작가'의 사이클이죠.


아무도 안 건드리는데 혼자 쓰러지고 혼자 일어서고, 쇼도 이런 쇼가 없어요.


KakaoTalk_20250630_083708648_06.jpg ▲ 빗소리를 들으며 쉬었다. 이 폭우에도 민속촌을 도는 용감한 사람들이 보인다.


지상에 떨어진 가엾고 딱한 생명체,
그 이름, 글쟁이여.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내 글 구려병'의 뒷면엔, '제발 내 글 좀 읽어줘'가 있죠.


진짜 내 글이 구려 보여서 구린 게 아니라, 내 글에 대한 세상의 침묵이 싫은 거예요.


독자들 반응이 좋으면 의심도 없이 쓰겠죠.


그런데 세상이 냉담하니까. 라이킷도 없고, 조회수도 안 나오고, 구독자도 안 나오니까. 나도 내 글이 구려 보이고. 믿을 수도 없고.


어느 브런치, 누구는 3개월 만에 구독자 천 명을 찍었다는데. 조회수 몇 만을 찍었다는데. 매일매일 응원받으면서 모바일 메인 화면을 차지하는데. 막 응원을 30만 원씩 받아요. 와, 입이 떡 벌어지죠.


그런데 내 브런치 알람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죠. 파란불이 들어오는 날이 있는가 싶어요.


문체 스타일도 바꿔 보고.


잘 나가는 브런치 모방도 해 보고.


필명이 문제인지. 제목이 문제인지, 주제가 문제인지?


그러다가 무릎을 딱 치며, "아! 프로필 사진이 문제구나!"


어처구니 없게도, 이런 생각까지 든다는 거죠.


KakaoTalk_20250630_083708648_13.jpg ▲ 비 맞고 나서 먹는 뜨끈한 온면.




응원 찍히는 잘 쓴 글이라면, 보통 여기서 "'내 글 구려병' 이렇게 극복했습니다"가 나와야겠죠.


근데 저도 병상에 누워 있는 중이라 약 주고는 못 끝내겠어요. 병자가 병자를 어떻게 고치겠어요? 나란히 같이 누워서 앓아야죠, 뭐. 서로서로 머리에 얼음주머니 좀 갖다 주고. 서로 맞구독도 하고, 맞라이킷도 하고.


독서를 더 해볼까. 글쓰기 스터디 모임에 나가볼까. '잘 나가는 글 쓰는 법' 같은 거 좀 읽어 볼까. 요즘 유행하는 그 뭐시기 퍼스널 브랜딩 같은 거 해볼까. 이런저런 궁리도 하면서. 그러다 보면, 감기를 앓고 난 후 면역력이 올라가듯, 자연히 내 글도 '내 글 구려병'을 앓기 전보다 좀 더 나아지겠죠.


다만, 그해 여름.


한국민속촌에 가서 흠씬 젖고 온 날, 그래서 뭘 했느냐.


무슨 대단한 걸 했느냐. 어떻게 위기를 넘겼는가.


별거 없습니다.


그냥 한 바퀴 돌고 밥이나 먹고 왔죠. 뜨끈한 국수 한 그릇.


희고 가느다란 소면이 느물 느물 풀리는 진한 고깃국물을 후후 불어 먹으며, 어휴 맛있다. 집 가서 글이나 써야지.


그러고 집에 오자마자 글을 썼죠. 달리 뾰족한 수가 있나요?


물론 그 조선 배경 성인물은 10화까지 쓰곤 폐기됐습니다. 조회수도 안 나오더라구요.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넣었습니다. 안 될 건 놓아줘야죠.


낚싯대 놓고 기다리다 보면, 대물도 건질 날이 오려나요?


모를 노릇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저는, '내 글 구려병'을 앓으며 발행 버튼을 누릅니다.


자박자박.


이 여름날, 야속하게 쏟아지는 빗속을 걸으면서요.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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