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서울 고궁을 걷다_1
박석 블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얇을 박, 돌 석. 얇게 깎은 화강암을 바닥에 깔아 만든 돌길입니다.
조선 시대 궁궐의 앞마당에서 자주 볼 수 있지요.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종묘의 월대, 왕릉 진입로에 깔린 울퉁불퉁한 돌길이 바로 박석입니다.
왜 정전 앞에 이런 돌을 깔았을까요?
박석은 투수성이 좋습니다.
돌과 돌 사이의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물길이 천천히 흐른다고 합니다.
많은 비가 내려도 범람하지 않지요. 삐뚤삐뚤한 돌길의 모양이 물의 속도를 줄여준다고 하는군요.
밟고 지나가면 그만일 돌 하나에도 담겨 있는 조상들의 지혜가 놀랍지요.
삐뚤빼뚤한 모양의 돌길을 따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썩 걷기 좋은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홈마다 신발이 걸리고, 높이가 들쭉날쭉해 종종 몸이 휘청입니다.
비라도 오면 제법 미끄럽지요.
그래서 박석 위에서는 늘 천천히, 조심조심 걸어야 합니다.
어느 부분은 높고, 어느 부분은 낮고, 때로는 홈이 패고. 그 사이로 물길이 흐르고…….
저는 박석을 걸을 때면, 가끔 제 인생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대지에 단단히 박힌 얇은 화강암 판 같은 삶 위에서 저는 인생의 높고 낮음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습니다.
삶은 울퉁불퉁합니다. 그 위에서 때로는 휘청이고, 때로는 미끄러지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하루, 또 하루를 살아 냅니다.
박석의 굴곡이 담아낸
삶과 쉼의 모습
이 길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고, 얼마나 하염없이 더 걸어야 할지도 알 수 없지만, 박석의 굴곡이 오롯이 우리네 삶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세상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벚꽃이 피었다가, 청단풍이 우거졌다가, 느티나무 낙엽이 밟히고,
다시 창경궁 앞마당에는 눈 속에서 홍매화가 피고,
폭풍이 한 번 쳤다가 갠 날도 있다가
온몸이 흠뻑 젖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돌연 순풍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박석의 돌들 사이로 빗물이 모이고 물길을 이루듯이, 어쩌면 사람의 인생도 삐뚤삐뚤하게 패인 삶의 홈을 따라 시절 시절의 눈물과 설움이 모여 흐르면서 인생의 속도를 줄여주고, 인생의 삐뚤빼뚤한 모양을 따라 삶이 또 흐르고, 흙에 스며들고, 그렇게 때로는 걸음을 멈춰 설 여유도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힘을 때면
세상이 말을 걸 때도 있어
이 브런치는 그런 기록들을 모았습니다.
외롭고 지친 삶의 조심스럽고 자박자박한 발걸음을, 그 느린 걸음 속에서 보이는 사물과 풍경과 먹거리와 그들이 건네는 위로를 모았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힘들 때면 세상이 말을 걸더군요.
죽지 말라고, 그래도 살아가라고, 오늘 하루를 견디고 또 내일을 맞이하라고. 본디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고, 전혀 두려워할 것 없으며, 모든 생물이 인생의 사계절을 겪어 낸다고 나지막하게 말을 건넵니다.
마치 박석이 말을 건네듯이.
조심스럽게 걷고 숨을 돌리고
삶의 고됨을 달래고
저는 흘러가는 구름이 비에 젖은 돌 위에 가볍게 뜬 박석을 밟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재밌게도, 박석은 흙이 숨을 쉬고, 돌 사이사이에 풀이 자라 돌판이 뜨거워졌을 때 흙과 풀 부분을 밟아 식히는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광화문을 넘어서 조정에 들어서면 서늘한 느낌이 드는 게 이 까닭이라고 하는군요.
이 브런치의 글들이 독자님께도 그런 쉼이 되길 바랍니다.
박석 같은 삶을 조심스레 걸으시되, 가끔 숨을 돌리고, 세상의 소리를 듣고, 고됨을 달래는 시간이 되시길.
그리고 부지런히, 또 한 걸음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이 글은, 제가 현재 준비하는 책의 머리말을 옮긴 것입니다.
사실 저는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지 이제 4달이 됐습니다.
봄 첫물을 마신 녹차 새싹 같은 글들입니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나름 열심히 키우고 있습니다.
3개월간 쓴 에세이 20편을 모아 책으로 정리하면서, 한 편 한 편이 박석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은 제목도 갈팡질팡한 이 책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드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때엔 좋은 책으로 브런치 작가님들과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런 기대를 품으며, 오늘도 박석 같은 단어 위를 자박자박 걷습니다.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