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예전에 데이터 라벨링 일을 했을 때 전화 상담 대화를 전라도 사투리로 만드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중학교 1학년까지 남원에서 살았기에 당당하게 지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하는데 사투리가 잘 생각이 안 나서 친정 언니와 동생에게 자문을 구했다. 동생이 최명희 작가의 혼불을 권했는데 막상 그때는 찾아보지 못했다. 이제야 이 책을 읽는데 어릴 적 고향으로 돌아간 듯 그 산골 어른들이 구사했던 언어들이 구수하게 느껴지면서 나의 마음은 그곳에 닿아있었다.
지난번에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읽는데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다. 낯선 경상도 사투리가 계속 턱턱 걸리는 것이다. 결국은 그 책은 포기하고 말았다. 아마 타 지역의 독자라면 이 혼불을 읽으면서 그때의 나와 같이 낯설고 답답한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전라북도 사투리는 좀 순하고 크게 낯설지 않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 책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고장만의 독특함이 강하게 드러나있었다.
남원에 가면 혼불 문학관이 있다는데도 가보지 못했다. 혼불 1권에 강모와 효원의 결혼식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을 모형으로도 만들어 놓았나 보다. 책으로 읽고 나서 사진을 보니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분주하고 흥분된 혼례날 잔치 분위기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소설은 대나무 숲 풍경으로 시작한다. 신부 효원의 마을 이름도 대나무가 많아서인지 '대실'이다.
나는 고향의 어릴 적 대나무 숲 풍경을 떠올리며 그 표현에 매료되었다. 1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끌고 가는 대나무숲을 시작부터 묘사하는데 두 페이지나 할애를 할 일인가 싶었다. 몇 줄 적고 나면 언어가 바닥날 듯도 한데 대단한 작가이다. 주저리주저리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판소리처럼.
엊그제 여행 가서 보았던 대나무 숲이다. 비록 멀리서 보았지만 소설 속 표현이 떠오르면서 정말 저 숲 안에 들어가 숲의 소리, 숲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첫 장, 대나무 숲 묘사
1, 청사초롱 7쪽
8쪽
" 아아 강실아, 둥글고 이쁜 사람아.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두 물들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강모는 사립문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겨울밤의 별빛들은 영롱하게 부서지며 바람에 씻기우고 있었다."
77쪽
강실이는 강모와 서로 소꿉친구 했던 사촌이다. 이제 열다섯 살 학생인 신랑 강모는 강실이를 그리워하며 신부와 첫날밤도 치르지 않는다.
그녀의 문학적 표현이 참 재미있다. 바람이 별을 씻기기도 하다니. 난 엉뚱하게도 '별을 밥 말아먹고 싶다는 표현도 써볼 수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모가 사는 매화꽃 날리는 매안 마을에 대한 묘사, 농촌의 모내기 장면 등도 기억에 남는다.
시할머니인 청암부인에 대한 서사, 시어머니 율촌댁과 며느리 효원의 서사가 다음 이야기 전개를 궁금하게 한다.
아프리카 부족 생각나는 1930년대 농촌의 공동체 씨족 문화, 양반과 상민의 신분사회,
복잡한 우리 예법이 담긴 전통문화 등도 흥미 있게 읽힌다.
남원 사투리가 재미있는 장면
97쪽, 모내기 장면
청암부인 시아버지의 세 번째 혼례, 207쪽
효원의 시집살이 231쪽
효원의 마음속 푸념이 판소리 장단에 맞춘 듯 리듬감이 느껴진다.
250쪽
창씨개명에 대한 상민들의 대화 장면, 사투리가 진하게 우러난다.
매안 이 씨 종부 3대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아직 1권에서는 합방도 못한 효원과 강모는 어찌 될는지.
나의 고향, 옆 동네 사매면은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친숙한 이름이다. 이곳이 소설 속 배경이라니 '혼불'은 나의 고향을 담은 소설이다. 거멍굴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 나누었던 어르신들이었다. 난 이 소설을 읽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 꽃이 떨어지는데 무엇이 좋은가요?"
"이 사람아, 꽃은 지라고 피는 것이라네. 꽃이 져야 열매가 열지. 안 그런가? 내 강아지."
청암부인과 손자 강모의 대화가 귓가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