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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 넘치는 내 친구 수경이

에세이

by 문이 Mar 20. 2025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자면 크게 생각나는 추억들이 없는 듯하다. 새벽에 통학 차량을 타고 학교에 가서 수업 듣고, 도시락 먹고, 밤늦게까지 야간 자율학습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곤 했다. 방학이나 주말에도 캄캄한 독서실에서 동네 단짝 친구와 공부하다 침 흘리고 자다 맥심커피 한잔 마시며 딴 생각에 빠진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참 무미건조하고 재미없었던 시절이다. 드라마에서 보면 학창 시절을 원 없이 즐기는 청춘들도 많던데 난 그때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에 자유롭지 못했던 거 같다.


그래도 굳이 재밌었던 추억들을 꺼내 보려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창작의 일은 힘들지만 재미도 있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은 내가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한다. 그 인식은 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고흐나 카프카도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지만 창작에 열의를 다하는 삶을 살았나 보다. 


솜씨가 좋진 않았지만 그림 그리는 것에 흥미가 있어서 미술시간이 좋았다. 동판화 그리기를 했을 때가 생각난다. 선생님은 동판화는 날카로운 선들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했다. 난 어릴 적 시골에서 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었던 보라색 엉겅퀴가 바로 떠올랐다. 선생님은 나의 밑그림을 보시고 소재가 참 좋다고 잘 그려보라고 해서 신이 나서 몰두했던 기억이 난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일이 있다. 축제 때였는지 어떤 수업에서 였는지 정확하진 않은데 각 조를 이루어 창작 무용을 짜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적이 있다. 그 과제는 주제도, 음악도, 동작도 조원들끼리 자유롭게 정해서 하면 되었다. 같은 동네 친구인 수경이는 우리 조였다. 수경이는 다양한 생각들로 머리를 굴려가며 많은 제안들을 쏟아냈다. 그중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독특하게도 '빨래의 운명'이었다. '운명'하니까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떠올랐고 그래서 음악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정해졌다.


'빠바바 밤~ 빠바바 밤~' 음악이 나올 때 우리들은 빨래가 되어 세탁기 안으로 들어간다. 흐르는 음악에 맞추어 빨래들이 (아니 우리들이) 세탁기 안에서(아니 운동장에서) 한 방향으로 돌아간다. 한참을 이리저리 쏠려 다니다가 탈수를 거쳐 빨랫줄에 걸쳐진다. 두 팔을 위로 올리고 몸을 위로 던져서 철커덕철커덕 무겁게 허리를 구부리며 끈 위로 착지한다. 마치 자신이 탈수된 빨래가 되어 기다란 줄에 널리는 거 마냥. 선생님이 잘 했다고 칭찬해 주셨던 거 같기도 한데 그 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조원 모두가 과정을 즐겼으며 우리가 만들어낸 작품이 자랑스럽고 보람 있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컸다. 그래서 삼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일들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작품의 큰 줄기는 친구 수경이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조원들의 의견과 합의가 덧붙여져 그날 우리들은 만족스러운 빨래들이 되었다. 그 시절 그 친구의 열정이 보기 좋기도 하고 부러웠다. 수경이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끈겼다. 


나의 삶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 그 친구가 오늘 되살아난다. 강한 의지와 창의성이 그녀의 삶을 이끌었는지 친구는 바라던 대로 중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한다. 친구는 오늘도 교단에서 아이들의 창의성을 끌어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나도 이제 글을 쓰며 창작의 열정으로 나의 의지를 불태워본다. 군더더기 생활들을 벗어던지고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일에 다가서려 한다. 미술시간에 나만의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창작무용에서 나의 몸을 던져 흥분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었던 것처럼 나의 마음이 원하는 곳에서 몰입을 즐기련다. Ai 시대에 인간의 가치는 개인의 경험과 창의성에서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AI도 대체할 수 없는 나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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