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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스폰서ㅡ누나편

by 플레이런너
왼쪽이 누나 가운데가 엄마 형, 오른쪽 사진은 누나 유치원 때


나는 어릴 적 고기와 생선을 먹지 못했다. 누나와 형을 고기로 키운 엄마가 반대로 나를 채식으로 키웠다. 그것이 역효과가 나서 체질적으로 고기를 거부하는 소년으로 자랐다. 보이스카우트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라면 한 번쯤은 다 가보고 으스대던 레스토랑도 나는 가보지 못했다. 왜냐면 친구들이 자랑한 것은 돈가스의 맛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초등학교 때 명동 거리를 구경시켜 주고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오므라이스’라는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 사람은 바로 누나였다.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줄리 앤드뉴스의 가족 뮤지컬 영화 ‘사운드오브 뮤직’ ‘메리포핀스’도 누나가 극장에서 보여주었다. 그것도 개봉 극장에서 말이다. 중학교 때 산울림의 콘서트, 이영훈의 피버스 콘서트를 누나에게 보고 싶다고 했다. 누나는 티켓을 종로서점에서 구해주었다.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평생 잊지 못할 황홀한 구경을 친구와 둘이 했다. 콘서트의 경험은 새로운 취미 영역으로 날 이끌었다. 난 전축을 마련하고 LP판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판들이 남아 있고 가끔 그때의 향수로 LP판을 파는 상점을 들르기도 한다. 어느 여름날, 누나는 북악스카이웨이에 있는 수영장에 날 데리고 다녔다. 요즘 말로 물 좋다는 곳이다. 겨울에는 동대문 스케이트장을 함께 가서 놀았다. 때로는 내 친구들도 함께 데려가곤 했다. 누나는 나와 내 친구들 과외 선생님도 했다. 나의 물질적 풍요와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의 가장 큰 공신은 언제나 누나였다. 내가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서 문화예술을 공부하고 관심과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바탕도 청소년기에 누나가 경험하게 해 준 문화자본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누나 결혼식, 대학교 때 가운에는 외할머니, 은기를 똑닮은 누나 대학교 때

영원한 스폰서일 것 같던 누나가 내가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결혼했다. 누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우리 집안의 세 남자 아버지, 형, 나의 용돈과 맛난 음식을 책임져주었다. 이 당시 경영자총협회 홍보실에서 근무하던 누나는 회사 일로 호텔에 다녀오는 날이면 뷔페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집에 오곤 했다. 누나가 퇴근하는 길을 기다린 가족들이 누나가 방에 들어오면 득달같이 누나 주변으로 둘러앉았다. 가방에서 나오는 각종 고급스러운 바게트와 과자를 참으로 맛나게 먹곤 했다. 이런 누나가 결혼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내 친구의 누나는 연애를 길게 했다. 그 누나의 남자친구는 내 친구에게 용돈을 자주 주는 것이 참 부러웠다. 나의 누나는 연애 기간도 짧았기에 매형에게 그런 호사를 누릴 기회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누나의 결혼은 그 당시 나에게 크나큰 재정적 손실인 것이다.

그런 나에게 반전이 일어났다. 누나가 결혼하고 나서도 엄마는 누나에게 줄 혼수품이 더 있는 듯했다. 누나 집은 평택 안중, 나의 대학은 수원 아주대였다. 그런 거리 때문에 학교 가기 전 누나 집에 남은 혼수품을 전달하고 학교로 갔다. 이때마다 매형은 아직도 줄 혼수품이 남아 있냐 하면서 어머니의 극성과 챙김에 놀라곤 했다. 올림픽 같은 기념 액자, 돗자리 등이었다. 누나 집을 나올 때 약국을 운영하던 매형이 따라 나오며 나에게 큰 용돈을 주었다. 사실 이 맛에 누나한테 가는 심부름이 좋았다. 이때 연극반에 빠져 있던 나는 동기들과 매형이 준 용돈을 술값으로 사용하곤 했다.

왼쪽은 부모님이 홍콩에서 마카오 가는 배,

대학을 졸업하고 선거 기획 사무실을 다니면서 난 여직원과 사귀었다. 그 여인은 알고 보니 초등학교 후배였고 집도 우리 집과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만나고 몇 개월 안 되어 결혼하겠다고 마음먹고 엄마에게 인사를 시켰다. 첫 상견례 끝나고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예비 며느리가 될 여자가 청바지를 입고 인사를 왔다는 이유로 엄마는 나의 결혼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던졌다. 어떻게 바지를 입고 인사를 올 수 있냐는 것이 엄마의 이야기였다. 엄만 상당히 강경했다. 난 엄마를 다방면으로 설득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필요했다. 엄마가 그 당시 가장 신뢰하는 한의원 한 선생과 누나였다.

종로 6가 한 선생님 한의원에 찾아갔다.

“선생님, 어머니께 궁합이 별로라고 하셨다면서요?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궁합을 다시 정밀하게 따져보니 좋다고 말씀해 주세요. 아니면 생년월일을 바꾸어서 궁합이 잘 맞게 해 주세요”

“그런 뜻이 아니고, 내가 소개해줄 여자와 궁합이 더 잘 맞는다는 뜻이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그렇게 어머님께 말할게”

김영진 결혼

또 한편으로는 누나를 통해서 엄마를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누나가 만나서 점수를 매기고 그런 다음 엄마에게 가감 없이 얘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누나와 첫 대면을 명동 롯데백화점에서 했다. 누나 앞에서 여인은 낯선 정장 차림으로 긴장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누난, 이 모습에 점수를 후하게 주었다. 누나는 엄마에게 그대로 전달했고 설득이 통해서 이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름 김영진 결혼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누나이다.

누나에게 부모님 여행부터 여름 피서 등 여러 가지를 제안했다. 누나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에 절대적으로 따라 주었다. 그래서 삼 남매가 적금을 부었다. 그 돈으로 부모님은 동남아시아, 필리핀, 하와이 여행을 다녀오셨다. 누나가 전적으로 많이 부담했기에 가능했다. 그 후 엄마의 칠순 잔치도 통 큰 누나 덕에 고급스러운 한정식으로 쉽게 치를 수 있었다. 우리 삼 남매와 아이들까지 함께 간 사이판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신혼생활을 바로 접고 엄마 집으로 들어왔다. 이때 누나와 매일 아침 통화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 엄마의 하루는 어떻고 엄마와 관련된 일상에 관한 대화였다. 작년에 개인적으로 서울대병원 정신과 프로그램 8주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때 의사의 역할은 정말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들어주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이렇게 누나와 대화하면서 스스로 해답을 찾기도 했다.


또한 누나는 나의 비즈니스에도 창의적 날개를 달아 준 일등 공신이었다. 누나의 약국 간판을 새롭게 만들라는 발주 부탁이었다. 홍대 거리, 강남 거리 등을 두 달 정도 조사 하느라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찍고 또 찍었다. 트렌드를 발견하여 로고와 디자인을 만들어 간판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매형과 누나가 몹시 만족해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그 후 매형이 안중 현화 지구에서 약국을 새롭게 하나 더 했다. 그 인테리어를 내가 맡게 되었다. 지난번 간판처럼 수많은 시장조사 끝에 결론은 디자인 설계를 전문가에게 맡겨야겠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천만 원이라는 디자인 비용을 지불했고 그 대가로 '잠수함'이라는 콘셉트로 진행하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리 기획이 좋고 디자인이 우수해도 클라이언트와 예산이 맞지 않으면 진행을 할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누나는 언제나 통 크게 나의 의견을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나 역시도 그 후 매형과 누나가 무언가 부탁을 하면 언제나 따뜻한 시선과 긍정적 마인드로 실천에 임했다.

왼쪽은 사이판 가서 전 식구가 배구놀이 하는 모습이다. 잠수함의 콘셉트 실내 내부, 아래는 조약국 간판
매형과 닮은 캐릭터를 제작해서 약국 앞에 설치했다

내가 요즈음 보는 누나는 약국을 운영할 때보다 행간에 여유가 느껴진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요즈음 명절 때면 마장동 친정에서 만나는 것이 아닌 병천 성묘에서 매형과 누나를 만난다. 병천에서 식사하고 헤어질 때 누나는 트렁크에서 소음인에게 좋다는 인삼꿀, 각종 선물 세트를 한가득 실어준다. 아내는 말한다.

“형님은 동생들에게 늘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시지. 동생들의 큰 복이야.”

누나는 요즈음 매형과 자주 나들이를 다닌다. 마치 퇴직자들이 제2의 인생을 설계하듯이 누나는 매형과 여유롭게 근교로 여행 같은 산책, 산책 같은 여행을 다니는 듯하다. 늘 누나를 모델처럼 배경과 어우러지게 찍는 매형의 사진 솜씨는 누나의 수채화 그림처럼 함께 성장하고 있다. 훗날 부부과 그림과 사진으로 함께 전시해 보면 좋겠다 싶다.

연세대 서인국 교수가 행복이란 아주 좋은 사람과 맛난 것을 함께 먹는 것이라고 했다. 누나는 예부터 이 정의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맛난 곳 있으면 어디든 우리 가족과 함께 다녔다. 지금은 누나 옆에 참으로 씩씩하고 멋지고 당당한 자식들이 엄마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누나 제2의 인생 설계에 응원을 보낸다. 혹 그 길에 작은 조약돌 하나 필요하면 난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안중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수채화 전시전, 누나가 그린 현재 마장동의 4층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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