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연극반과 졸업후에 연극을 하면서 기획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연극’ 이라는 활자가 눈에 들어오면 아몽(아주대학교 연극반)이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내 젊음을 불살랐던 곳이 아몽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대학 생활을 아몽으로 했다. 일 학년 아몽에서 '옛날옛적에 훠어이훠이', '싸움터의 피크닉' 두 편의 연극을 경험했다. 이 두 편으로 1학년 생활은 거의 마무리 되었다. 1학년말쯤 연극반 아몽의 총선이 실시되었다. 내년도 회장과 부회장을 뽑는 선거였다. 선배 중 한 명이 나의 동기 기석을 추천한다. 당시 김영진을 추천하는 아몽인은 없었다. 분위기를 보아서는 기석이의 당선이 틀림없어 보였다. 현 아몽회장인 재호 형이 재차 추천 의사를 묻는다. 순간 조용하다. 술자리에서 '내년도 회장은 영진이다' 이런 얘기를 소주잔과 함께 몇 번 왔다 갔다 한 적은 있었다. 마음속으로 술 먹고 나눈 이야기여서 믿을 수 없는 것인가? 그때와는 분위기가 온도차가 나는 것인가? 하고 있을 때 사회자 재호 형이 나를 추천한다. 그래서 후보는 나와 기석이 두 명이 되었다. 이제 후보자 정견 발표 시간이다. 기석이는 기억은 안나지만 평소 말솜씨로 보았을 때 아마도 훌륭한 후보 발표를 했다고 생각된다. 상대적으로 나는 떨려서 매우 밋밋하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밖에는 못했다.
그런데 말도 제대로 못한 내가 투표 결과 당선이 되었다. 나름 괜찮은 득표를 했다. 선거 뒷풀이로 늘 가던 기숙사 식당에서 했다. 기숙사에 있는 식당이 아니라, 식당 주인장이 기숙사에서 일을 해서 기숙사 식당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나를 추천한 재호 형이 특유의 억양으로 말한다.
“신임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나 아니면 회장 안되었다. 내가 추천했다. 마음들은 같으면서 왜 추천들은 안했지? 내가 그것을 현 회장으로써 읽고 긁어준 거잖아”
꽤나 긴 시간 동안 생색내기가 반복해서 이어졌다. 이것 때문에 이차로 꽤 비싼 고급 술집에 가고 말았다. 학생들이 갈 수 없는 곳을 갔다. 그것도 돈도 없이 갔다. 그 결과 나올때는 다 벗고 나왔다.
이렇게 해서 난 아몽극회 회장이 되었다. 그날 명진 누나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아몽 회장은 하기 나름이지만 대통령 이상으로 바쁜 자리이다. 회장의 책임이 매우 크다. 아몽은 회장 역할에 달려있다.”
누나의 이 말은 큰 울림이 되어 내 마음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1학년 겨울방학이 아몽 연극반 회장으로서 임무의 첫 시작이었다. 방학은 연극반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시간이다. 연극 연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차기 작품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이었다. 연출은 아몽 3기 경수형이었다. 그리고 난 기획을 맡게 되었다. 기획을 맡게 된 사연이 있었다. 바로 직전 작품이 “싸움터의 피크닉”이라는 공포 코미디 연극이었다. 연출과 기획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의 동기 9기가 만든 작품이었다. 그러나 작품의 점수에는 선배들이 매우 인색했다. ‘그 결과 앞으로 아몽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9기들에게 연극은 어떻게 진행되고 이루어는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취지로 유리동물원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장으로써 기획을 맡아라‘ 그런데 내 동기들은 방학 때여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유리동물원의 연습은 화곡동 '밝은생활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연출자인 경수형이 잘 아는 곳이었다. 나중에 감사의 표시로 팜프렛에 광고를 무료로 실었다.
나에게 문제는 두 달 동안 대관료도 없는 훌륭한 연습 장소 였지만, 왕십리와 거리가 꽤나 멀다는 점이었다. 심리적으로는 총알 택시를 이용하는 아주대학교가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배우도 스태프 아닌 성구 형은 화곡동 연습실에 매일 왔다. 내 생각에 선배란 역할과 상관없이 연습을 매일 참관해주는 것이 선배의 자세인가 보다 생각했다. 연습 끝나고 집이 가는 방향이 비슷해서 지하철을 타고 같이 온다. 그러다 신당역 안 지하철 타는 곳에서 담배를 몇 대씩이나 피며 아몽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꽤나 길게 나누었다. 그러다 급기야 내가 제안을 하곤 했다.
"형님 맥주나 한잔 하시죠?"
그럼 성구형은 언제나 흔쾌히 승락하셨다. 성구형 집이 신당동, 난 마장동이어서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그 거리만큼이나 형과 인간적으로 이때 친해졌다.
“기획도 작품 분석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
연출 경수형의 말씀이었다. 기획을 더 잘하려면 작품 분석에는 꼭 참석하라는 뜻이었다.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집에서 오전 열시쯤 나와서 마장동과 가까운 동마장 터미널로 간다. 수원 남문에 내린다. 이곳에서 아몽 선배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바로 나의 일년 선배 8기 재호형이다. 연극에서 기획은 집안의 아버지로 비유되고 연출은 어머니로 치환한다. 기획은 아버지처럼 돈을 만들어야 했다. 가장 큰 임무는 팜프렛에 만들 광고를 따오는 것이다. 그 일을 나와 같이 하자고 재호 형을 설득했다. 그랬더니 기꺼이 그러자 한다. 사실 인간 정재호는 나이는 한 살 많지만 아몽에서는 엄청난 대선배처럼 행세를 했다. 그런 인간이 후배는 기획, 본인은 기획보를 기꺼이 맡는 것이다. 지금 같아서도 쉽지 않은 일이라 여겨진다. 아마도 이 일로 인해 재호 형과 인간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된 것 같다.
둘은 한 달 반 이상을 남문에서 수원역 쪽으로, 남문에서 북문 쪽으로, 남문에서 학교 가는 방향 쪽으로 다녔다. 그리고 학교 앞쪽의 상가들, 매탄 아파트 쪽 상가들을 싹 훑었다. 광고를 따러 다닐 때 매우 중요한 준비물은 팜프렛 가안이다. 두꺼운 도화지에 표지, 회장 인사말, 그런 다음 빈자리에 박스를 쳐서 광고 영역을 보여준다. 준비가 되었으면 영업 대상이 필요했다. 무턱대고 아무 업소에 방문하지 않았다. 아몽 연습 때 회식 또는 아몽 쫑파티, 아몽인 각각이 개인적으로 적어도 딱 한 번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곳을 주로 영업 대상처로 삼았다.
남문에서 학교 쪽으로 걸어가는데 '시사영어학원'이 보인다. 들어가 보고 싶었다. 이제 막 생긴 학원이었다. 홍보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뻥을 쳤다. '영어가 필요한 연극반 식구들에게 학원을 강력하게 추천하겠다'. 더 나아가 팜프렛 광고의 효과를 얘기하다가 급기야 포스터 광고 효과는 더욱 뛰어나다는 헛소리를 마구 지껄였다. 포스터는 수원 전역에 다 볼 수 있을 만큼 효과를 본다고 말이다. 그 후 몇 번 그 학원을 더 갔다. 그리고 포스터 하단에 광고를 따냈다. 가격은 십 만원이었다. 이 당시 등록금이 사 십만원이었다. 꽤나 큰 돈이었다. 이 기쁜 사실을 알리기 위해 화곡동 연습실로 달려갔다. '선배들이 하는 말이 포스터에 광고를 따온 것이 김영진이 처음인 것 같다. 그럼 이제 배우들 캐런터도 나오겠다'고 하면서 경수형, 성구형, 종규형, 명진 누나, 복자, 삼룡 모두 기뻐했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배우들 교통비가 지원되었다.
학교 앞에 레스토랑 분위기의 맥주 집(마로니에 상파뉴)이 새로 오픈했다. 영업하기에 딱이었다. 몇 번을 갔지만 손님은 별로였다. '아몽의 광고주가 되어주면 그만큼 이용하겠다. 믿어달라.' 이 말만 수차례 반복했다. 여자 사장님이 학생을 한 번 믿어 보겠다고 하면서 팔 만원에 계약을 했다. 보통의 광고비보다 두 배 이상을 받았다. 내 생각에는 많이 받고 그 만큼 이용하자는 주의였다. 그래서 이곳에서 유리동물원 쫑파티를 하게 된 것이다. 소극장 무대에서 늘 하던 쫑파티를 여기서 했다고 너무나도 부르조아틱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또한 이때 수원에 있는 대학교 연극반 교류가 있었다. 네트워크는 다름 아닌 서로 간의 연극 공연 봐주기였다. 공연 보고 주최 측이 술을 사는 것이 법도였다. 이때도 이곳을 이용했다.
이전까지는 기획으로 따낸 광고료 수입이 이십 오만원정도 였다. 반면 내가 기획한 유리동물원에서는 사십 만원으로 거의 두배의 성과가 나타났다. 이렇게 보면 난 영업에도 소질과 재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는 영업에 영 신통치 않았다.
또한 기획의 임무 중에 포스터, 팜프렛, 티켓을 만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난 이때까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 당시 누나는 한국경영자총협회 홍보실에서 근무했다. 그 덕에 사진을 매우 잘 찍었다. 그래서 사진 촬영은 누나에게 부탁했다. 증명사진이 아닌 예술인 같은 느낌이 나면 좋겠다고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가 화곡동까지 와서 무료로 찍어주었다. 스태프 사진 중에서도 나름 선명하고 깨끗한 사진은 누나가 찍은 사진들이다.
포스터 표지 디자인은 누나 친구 중에 미대를 졸업한 누나가 있었다. 그 누나에게 작품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나온 표지 디자인이다. ’유리동물원‘은 해설자이자 주인공인 톰이 관객들에게 연극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연극은 그의 어머니 아만다와 누나 로라에 대한 톰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기억 연극'이다. 어느 날 동생 톰이 엄마의 성화로 로라에게 신랑감으로 짐을 소개한다. 둘은 이때 춤을 춘다. 그때 로라가 정성스럽게 기르고 간직한 유리동물이 깨진다. 이런 점에 촛점을 맞춘 디자인 컨셉 같았다. 포스터 디자인은 톰과 깨진 로라의 유리동물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난 이 디자인을 보고 한 번에 좋다고 했다. 선배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별로 묻지 않고 다 좋다고 했다.
회장 겸 기획의 입장에서 초대의 글을 써야 하는데 글에는 문외한이어서 작가 수준의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상의 시를 빗대었다면서 몇 자 적어서 준다. 그 친구가 써준 것을 그대로 복사했다. 그리고 맨 끝줄에 한 줄 덧붙인다. '종규형 배고파,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획의 업무 중에서 중요한 것이 또한 홍보 일이다. 이때까지 아몽의 공연은 수, 목, 금의 평일 삼 일이었다. 수업 없는 토요일 날 공연도 하고 쫑파티도 하면 그냥 좋을 것 같았다. 이유는 쫑파티가 토요일이면 졸업생들이 오기에도 좋고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몇몇 선배들이 걱정스러워했다. 아몽 공연의 관객은 아주대생인데 토요일 학교에 학생이 없는데 객석을 채울 수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토요일 공연은 관객은 없다 라는 마음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답변했지만 심히 신경이 쓰였다. 어떻게 토요일 객석을 채울 수 있을까? 그래서 토요일 학교에 남아 있는 기숙사, 도서관에 사전 홍보와 당일 홍보를 했다. 공연 한 시간 전에 학교기숙사 수위실로 가서 마이크를 잡고 홍보했다. 기숙사에서 나름 시간과 싸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가장 유효한 전략이었다. 포스터에 토요일만 따로 표시를 했다. 그리고 이때 학교 앞에 연립주택이 생기고 있었다. 그곳에도 뿌리고 붙였다. 매탄동의 아파트 단지에도 돌렸다. 그래서 그랬는지 뜻밖에도 토요일 공연에 객석이 거의 만석을 이루었다. 이때 기쁨은 비유하자면 선우가 경희대가 합격한 것 이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것이 전통이 되어서 아몽 공연은 토요일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곧 일요일날, 월요일날 공연을 하는 전통과 달리하는 기획자를 보고 싶기도 하다.
공연은 신입생 입학을 축하하는 성격의 연극으로 3월 둘째 주였다. 이때는 학생과에 대본, 공연계획서를 제출하면 승인을 해주었다. 그러면 학교에서 예산을 지원해 주었다. 일년에 75만 원, 1회 공연 25만 원,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전체 동아리 중에서 아몽은 예산이 상당히 센 편이었다. 예산과 소극장 사용에 대한 승인을 받는 것이 기획 임무에서 중요했다. 그런데 학교의 학사 일정 때문에 승인 처리가 계속 미루어졌다. 포스터 인쇄를 빨리 할 수가 없었다. 조바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도화지를 반 접어서 그곳에 매직으로 ’유리동물원‘ 이라고 적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학교 화장실 벽, 가로등, 강의실 문 등 사람의 시선이 일직선으로 닿는 곳에 모두 붙였다. 없어지면 또 붙이고 또 붙이고를 자동으로 반복했다. 그 결과 학생들이 도대체 유리동물원이 뭐냐 하는 궁금해하는 소리들을 종종 들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다. 일단 포스터 나오기 전에 뜸은 잘 들인 것 같았다.
이러는 사이 학생과에 승인이 나와 인쇄를 할 수 있었다. 아몽 선배 중에 3기 신진구 형님이 아르바이트로 기획사에서 일을 한다고 해서 그곳에 맡겼다.
가장 큰 고민이 인쇄물 수량에 있었다. 이 당시 '기획의 달인'처럼 느껴졌던 창수 형이 조언을 하셨다. 티켓 몇 백장 인쇄해서 공대 앞에서 나누어 주던 티켓을 열 배정도 늘려서 대규모로 뿌려 보라고 포스터, 팜프렛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선배님 말씀대로 그렇게 했다. 티켓을 오천 장, 포스터 칠백장 그 후 아몽 공연에서 홍보물 수량이 대거 늘어나게 된 배경이었다.
그리고 홍보 할 수 있는 곳은 전부 찾아 보았다. 1학년 교양 수업 시간 바로 직전에 들어가 연극 홍보를 했다. '여러분 입학을 축하하는 공연이다. 고로 꼭 봐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오면 나를 따라오는 1학년이 있었다.
"선배님, 그 연극, 수업과도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학교 방송국에는 인맥을 이용해서 개인적으로 부탁을 했다. 수시 때때로 학내에 유리동물원 소식을 알려주었다. 동아리 활동하는 학생들이 그래도 관심이 있을 것 같아 각 동아리룸에 홍보와 초대권을 뿌렸다. 도서관, 각 학과 게시판, 주말 산상교회, 유신고등학교, 학교 앞 상가, 매탄 아파트 근처, 우만동 주택가, 남문 상가, 호프집 등 이런 곳에 포스터는 유리창에 우리가 직접 붙이고 티켓을 몇 십장씩 주었다. 그리고 주인장에게는 도장 찍힌 초대권 두장을 따로 주었다. 막 2학년이 된 신입생들의 공연이기 때문에 아직 후배가 없었다. 그래서 나와 내 동기들 종욱, 호영, 남하, 경수 등을 스탭으로 같이 다녔다. 이때 슬로건이 '동기사랑 아몽사랑'이었다. 그 후 이 동기들과 동아리룸을 깨끗하게 개선하는 아미추위(아몽극회미화추진위원회), 선거를 관리 했던 아선추위(아몽극회선거추진위원회)로 계속 이어졌다.
공연 타이틀이 ’아몽극회 10주년 기념공연‘ 및 ’신입생 환영 공연‘이었다. 10주년 기념공연에 걸맞게 졸업생 1기 선배인 인석 형님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던 정치외교학과 이화수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부탁을 드렸다. 흔쾌히 승락하셨다. 교수님은 그후 음식을 가지고 아몽 연습에도 오시고 아몽 총회 때 동아리룸도 오셨다. 축사 역시 그 전 지도교수와는 달리 원고지에 직접 쓰셨다. 나중에는 아몽인의 주례도 서시게 되었다.
공연 연보도 10주년에 맞게 기존 것과는 다르게 동아리룸에서 역대 공연한 자료들을 다 찾아 연출과 기획, 배우들의 이름을 전부 정리해서 활자로 새겨 넣었다.
또한 10주년 아몽의 역사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도 말이 된다 싶어 선배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실었다. 그런데 쫑파티 때 이것 때문에 선배 한 분에게 혼이 낫다. 기록의 오기가 있다면서 말이다. 난 지금도 무엇이 틀렸는지 모르겠다.
이 당시 아몽 공연은 입장료가 따로 없었다. 단지 오백원에 파는 팜프렛을 사주면서 입장하는 것이 예의였다. 입구에서 팜프렛을 아주 잘 파는 아몽인들이 따로 있었다.
이때 의상을 서울여대 의상학과 유미숙님이 맡아주었다. 경수형과의 개인적인 인연이었다. 배우들의 의상을 직접 만들었다. 그것도 값싼 재료로 훌륭하게 의상을 제작했다. 크리넥스 휴지로 멋을 부리기도 했다. 이때 숙경 누나가 의상을 같이 했다. 그 후 아몽 의상에서도 옷을 제작하는 문화가 생기게 되었다. 사실은 의상보다 서울여대와의 무언가 썸씽 같은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안 가도 되는 서울여대를 일부러 가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특히 나는 여학생들과 말만 해도 그냥 얼굴이 빨개졌다.
경수 형은 내가 겪은 아몽인들 중에서 가장 프로다운 연출가였다. 열정과 성실성 책임감 등 모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 또한 얼마나 철저했는지 주인공 로라처럼 가날픈 몸매를 만들기 위해 배역을 맡은 복자의 식단까지 관리할 정도였다.
2시간 40분짜리 유리동물원 공연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소극장에 불이 꺼진다. 나중에 들어오는 관객을 안내할 겸 난 극장 맨 뒤에 서 있었다. 그 찰나의 어둠 속에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낀다. 무대에 불은 켜지고 종규 형, 톰이 등장한다. 두 세달의 흐른 시간과 함께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흘렸던 눈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런 경험은 내게 처음이었다. 폭풍처럼 눈물이 흘렀다. 흐르는 눈물양과 비례하듯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테네시 윌리암즈라는 명성과 유리동물원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랬는지 그 동안의 홍보가 먹혔는지 매회 만석이었다. 첫날 관객들이 연극 괜찮네 하면서 소문을 잘 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때 알았다. 기획은 흥행이다. 아마추어 연극이든 뭐든 간에 반드시 객석은 채워야 한다. 그후 나의 기획 법칙이 되었다.
유리 동물원까지 두 번의 공연에서 쫑파티를 경험했다. 난 약간 다르게 했으면 했다. 우선 장소부터 그렇고 앉아서 각자 인사하고 술 먹는 것을 좀 더 짜임새 있게 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식순이라는 것을 혼자 만들어보았다. 그리고 그 김에 내가 사회까지 보았다. 맨 처음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몇몇 선배들 몸짓과 말투 흉내를 냈다. 용민 형, 경수 형, 창수 형 이었다.
출발부터는 두 달, 준비까지는 세 달 정도 걸린 공연이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아몽의 전통은 공연 다음 주에 품평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품평회에서 기획이 너무나도 잘했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칭찬 한 마디에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 고생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변한다. 칭찬은 분명 ’영진이‘를 춤추게 했다.
연극반 활동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어려움은 돈이었다. 차비, 밥값 모두 사비였다. 난 잠만은 집에서 자야 한다는 엄마의 가르침 때문에 언제나 북문의 총알택시를 타고 새벽에도 집에를 갔다. 북문에서 한남동까지 이천 원, 한남동에서 마장동까지 오백 원, 그리고 학교에서 북문까지 오백 원 약 삼천 원의 돈이 필요했다. 그러면 같이 술을 먹는 성구형에게 천 원 또는 이천 원 호영, 종욱에게 천 원 이렇게 마련해서 택시를 탄 적이 참으로 많았다. 이 돈을 갚지는 않았다.
유리동물원 이후 난 바로 다음 공연에서도 연거푸 기획을 맡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맡던 간에 기획 업무를 조언하게 되었다. 후배들이 기획 때문에 만나자고 하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만난 동기, 후배들과 친해졌다. 동기 종욱, 대석, 김호, 한선, 주범, 학철, 준흥 등등 이었다.
첫 연극 배우로서의 경험은 '옛날옛적에 훠어이훠이'였다. 3막까지 안토벤 형(안경진 형)과 음향을 하고 4막에서 마을사람들로 무대를 밟는다. 딱 한 마디의 대사가 유명해져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저기 꽃이 떨어지는군"
그 대사 후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구잡이 춤을 추면서 연극은 막을 내린다
'싸움터의 피크닉'에서는 기획보, 음향보, 진행보 등을 맡았다. 그러다 리허설 때 전격적으로 배우로 무대에 올랐다. 역할은 위생병2이다. 내가 위생병1과 함께 뛰어서 이동식 들것을 들고 무대에 나타나면 연극은 막을 내린다. 대사도 없다. 정말 짧은 출연이기 때문에 나의 얼굴을 잘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 나를 보고 동기를 통해서 소개팅이 들어왔다. 그래서 만나기도 했다.
세번째 네번째가 회장이면서 기획을 연거푸 맡은 '유리동물원' '알'이었다. 여름 방학에 연습을 시작한 '도적들의 무도회'에서는 연출을 맡은 인명 형에게 파로호 엠티에서 배우를 시켜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회장인데 연기를 못한다고 뭐라 할 수 없고 혼을 낼 수도 없을 것 같아 아예 배우로 생각지 않았다"
연출 인명 형의 생각이었다. 이것을 나름 설득했다. '욕해도 좋다.' 결국 '두뽕부'라는 배우를 맡게 되었다. 단역 보다는 조금 긴 역할이었고 나름 강렬한 이미지가 생겼다. 내 대사에 관객들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들 두뽕자(호영)에게 도둑질이 들킬까봐 한마다 한다.
"나가자, 디디에"
시이먼(작은성오)과 피어터(나, 오른쪽)
3학년이 되었을 때 동기들은 모두 군대를 갔다. 난 연극한다고 학생 신분을 유지했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는 주인공 에번의 배다른 형 피어터 역을 맡았다. 코를 푸는 연기가 있었는데 정말로 코가 왕창 나와 순간 당황 했다. 관객들은 엄청 웃었다. 또한 이때 삼각산 국민대학교 뒤 서광사라는 절에서 아주대학교까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 엄마에게 공부하겠다고 절에 갔다가 잠만 잔 꼴이 되었다.
그 다음 공연 만선에서는 음향을 맡았다. 한국적인 음향과 효과음이 필요해 국립국악원에 찾아 갔다가 국악인 음악가 김영동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초원, 회상 등의 음악을 극에 사용했다.
최영진 형이 한국 최초 번역이라고 늘 강조했던 "달콤한 청춘은 새처럼 날아가고(스위트 오프 유스)"에서는 휴학계를 낸 신분으로 음향을 맡았다. 아몽에 입학하고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연극에 참여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연극에 합류해서 완주했다. 이런 경험으로 훗날 내가 마라톤 풀코스를 그나마 완주한 듯하다.
군대 갔다 와서 우리 동기가 중심이 된 '굿닥터'에서는 손재주가 전혀 없는 내가 무대감독을 맡았다. 특이한 것은 무대감독이 톱 한번 잡지 않고 감독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거꾸로 연출 종욱이는 톱을 많이 잡았다. 비가 무척 내리는 날 형이 운영하던 '세성기획'에서 굿닥터 팜프렛, 포스터를 실고 운반 하다 인덕원쯤에서 앞에 차 택시를 받았다. 운전수는 나였다. 차에는 봉근이와 또 한 명의 아몽인이 탑승했다. 다친 사람은 없고 맵시 앞쪽이 많이 쭈그려졌다. 처음에는 택시회사가 학생이라고 겁과 공포를 주었다. 그러나 경찰의 중재로 합의를 잘 봤다.
아몽은 졸업 후에 세 번의 OB 공연을 했다. 난 모두 기획을 맡았다.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굿닥터'때 기획을 맡았다. 또한 '물에 빠진 사나이'에서는 단역 배우 경관으로 등장했다.
"삼십 코페이카, 사십 코페이카, 오십 코페이카" 역시 이 대사를 하면서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주로 단역을 한 나의 배우 공통점은 대사를 하면서 무대를 떠난다는 점이었다.
연극을 본 선우가 아빠의 이 대사를 자주 따라 하곤 했다.
마포 문화체육센터에서 올린 '라이어' 공연에서는 기획을 맡았다. 기획이었지만 연출의 잦은 부재로 말미암아 적어도 조연출 비슷한 역할은 하기도 한 듯 하다.
왕십리 소월아트홀에서 공연한 '택시드리벌'에서는 구청에 지원을 받기 위해 극단 대표로 셀프 임명되기도 했다. 세째날 오백석의 관객을 채운 날은 연기가 그냥 저절로 되는 듯 했다. 특히 개인적인 문제로 도중하차한 선배 대신에 연습 초반부터 연출을 맡게 된 용민 형에게는 학교 때 느끼지 못했던 인간적인 매력을 알게되었다.
난 지금 직업적으로 기획사를 운영 하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홍보 기획 뿐 만 아니라 행사기획, 문화기획, 마을기획 등 다양한 기획사를 경영하고 있다. 올해로 26년째이다. 이렇게 오래 할 줄을 몰랐다. 이 바탕은 모두 아몽 연극반 기획에서 시작됨은 분명하다. 아몽 그 이름 영원하리라^^김영진의 기획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