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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을 입다

은혜로운 손길이 닿는 곳, 도선동의 헤어샵 이야기

by 영진 수필가 Mar 26. 2025

 아주 오래전, 상왕십리역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한 미용실을 발견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장님이 물었다.     

“원하시는 스타일이 있으신가요?”     

“그냥 짧고 예쁘게 해 주세요.”     

내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반곱슬인 내 머리는 조금만 자라도 산발이 되곤 했다. 게다가 평소 관리도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자, 다 됐습니다.”     

눈을 뜨니 마술처럼 변신한 내 헤어스타일이 거울 속에 비쳤다.     

집에 돌아가자 아내가 어디서 머리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꺼이 정보를 공유했고, 그다음엔 우리 아이들까지 데려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전부 그 미용실의 단골이 되었다.     

그 후로도 나는 다른 헤어숍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내 스타일을 가장 잘 아는 곳이기 때문이다. 매번 머리를 자르고 나면 원장님께 부탁해 사진을 한 장 찍는다. 기분을 업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 미용실은 점점 성장해 대규모 사옥으로 확장했고, 지금의 도선동으로 이전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성한모(송강호 분)가 동네에서 오랫동안 터를 지키고 있듯이, 도선동에서는 이 원장님이 이웃들의 머리를 책임지며 ‘성은’을 베풀고 있다.     

그 미용실의 이름이 바로 '성은 미용실'이다.     

‘성은’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자연스럽게 드라마 속 대사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떠올렸다. 사실 내가 아는 단어의 의미는 그 정도였다.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궁금해서 오래전에 원장님께 물어본 적이 있다.     

“제가 다니는 교회 이름이 성은이에요.”     

사전에서 ‘성은(聖恩)’을 찾아보니 ‘임금의 은혜’ 또는 ‘하느님의 거룩한 은혜’라는 뜻이 있었다. 또 다른 의미로는 ‘풍성한 은혜(盛恩)’라고도 했다. 결국 공통점은 ‘은혜’였다.     

아하! 이곳은 단순한 미용실이 아니라, 은혜로운 미용실이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를 사업의 이름으로 내걸 만큼 원장님의 믿음은 깊었다.     

나는 같은 성동구에서 활동하며 상공회를 비롯한 여러 모임에서 원장님을 자주 뵈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녀의 베풂과 봉사를 알게 되었다.     

최근 성동상공회의소 23기 과정이 한양대에서 개강했는데, 45명의 입학생 중 무려 8명을 원장님이 추천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원장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것을 지인들과 적극적으로 나누며 실천하는 분이었다. 교회에서도 전도를 많이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밝은 미소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그녀에게서 하느님의 은혜가 느껴졌다. 게다가 원색의 옷을 과감하면서도 세련되게 소화하는 패션 감각까지 갖추고 있다.     

오늘도 나는 성은 원장님에게 머리를 ‘성은’ 받으러 간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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