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혹은 과대망상
H가 대학을 졸업할 때는 말 그대로 경제 호황기였다.
소위 금리, 유가, 환율 등이 모두 좋아 불타는 경기라고 할만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는 결정만 하면 갈 수 있는 직장이 여럿이라 고민을 해야 했다. 결국 H는 당시 가장 좋은 직장이라는 증권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좋은 것이었다는 걸 입사 첫해 여름휴가 때 확신했다. 여름휴가를 간다고 하자 자신이 담당한 고객들이 휴가비로 쓰라며 건넨 돈으로, 당시 TV만 틀면 광고로 나오던 자동차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승승장구. H의 젊은 시절을 표현하기에 이 말만큼 정확한 건 없을 것이다. 경기가 좋을 때였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으니 안 좋을 게 없었다. 실적도 좋아서 보너스도 많이 받았고, 그러니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비교적 빠르게 서울에서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H는 두 번의 실수 때문에 무너졌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먼저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 부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아는 동생과 함께 식당을 크게 차렸는데, 그 아는 동생과 본인이 문제였다. 아는 동생과 본인 그리고 H의 아내 중 식당을 해본 사람은 없었고, 그저 좋은 것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사람을 쓰면 되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 어떤 사업이건 사람을 써서 되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인데, 그건 돈이 아주 많은 경우이다. 그래서 내가 아닌 누군가 하는 실수를 새로운 사람이든, 새로운 방식이든 돈으로 메꾸면 되는 경우뿐이다. 그러니 H가 부업으로 한 식당이 잘될 리가 없었다. 아무리 고깃집이라지만 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식자재 구매를 남에게 맡기기 시작하고, 주인이 식당에 있는 시간이 줄다 보면 결국 개업발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파리가 날리기 시작했다. H는 식당을 정리하던 중 가끔 카운터를 맡던 직원이 약간의 돈을 빼돌렸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심증은 명확하지만 물증이 없으니 그저 속만 상할 뿐이었다. 결국 H는 큰 손해를 보고 식당을 정리했고, 부모에게 손을 벌려 식당을 함께 차렸던 아는 동생 또한 큰 손해를 보고 말았다. 그 손해는 결국 그 '아는 동생'의 부모몫이 되었다.
아는 동생과 달리 H는 여전히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이때도 역시 회사에서 신규로 낸 지점의 지점장을 맡고 있었다. 다만, 식당이라는 부업을 하기 전과해서 큰 손해를 입고 난 후의 H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조금 조급해진 것이었다.
H는 빨리 실적을 올려 식당에서 입은 손해를 빨리 만회를 하려 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공격적으로 영업을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고교동창 몇 명이 H를 통해 나름 큰돈을 주식 시장에 투자했는데 이게 문제가 되었다. H를 통해 투자한 돈에 큰 손해가 발생하면서 투자한 사람들이 H에게 투자금 회수 및 손해를 입은 금액에 대해 메꿔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와 관련한 전후 사정을 정확히 모르지만, H가 그들의 요구에 대해 항변하거나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돈을 끌어다 그들의 요구에 응한 것으로 볼 때, 내가 모르는 어떤 약속이나 실수를 H가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H의 경력은 내리막 길이었다. 몇 년 후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H는 아는 사람들의 돈을 대신 운영해 주는 일을 아주 잠깐 한다고 했지만, 곧 무직과 무적의 상태가 되었다.
이때쯤 H가 빨리 정신을 차리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서 취업을 하거나 무슨 일이든 했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H는 이때부터 보통사람들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과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선물에 투자를 잘해서 20억 정도의 수익이 났는데, 지금 이 돈을 꺼낼 수 없으니 돈을 좀 빌려달라거나,
-20억 넘는 숫자가 보이는 잔고 이미지를 보여주며, 돈은 언제든 갚을 수 있으니 돈을 좀 빌려달라거나
-돈을 맡긴 투자자와 잘 얘기가 되어 다음 주에 돈을 찾아 나누기로 했으니, 돈을 좀 빌려달라거나
하는 일련의 행동과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실제적으로 돈을 버는 활동은 하지 않은 채 십수 년 이상을 주변 사람들의 돈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H와 그의 아내에게 2억이 넘는 돈을 생활비로 주었고, H의 동생 또한 먹는 거 입는 거를 비롯해 생활비로 수백에서 수천까지 몇 년에 걸쳐 건넸다.
간혹 H의 아내가 큰 벌이는 아니지만 생활비를 벌어올 때도 있었지만, H가 생산적인 활동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지는 못했다. H의 자식들이 대출금과 주변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해 취업하자, 결국 H의 자식들이 집에 생활비를 대기 시작했다. H의 자식들이 결혼으로 분가하자 그때부터는 H의 아내가 비정기적으로 벌어오는 약간의 돈과 미리 당겨 받는 국민연금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H에게 돈을 빌려줬던 나의 지인은 결국 H를 고소했고, H의 자식들이 찾아와 울면서 아빠를 용서해 달라, 빌린 돈은 한 달에 얼마씩 갚겠다는 각서를 쓴 후에야 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H가 망가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책임은 본인에게 있었다. H는 일확천금이 아니라 한 줌의 흙을 모아 웅덩이를 메우고 집을 지을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오랜 증권회사에서의 경력으로 인해 단 한방으로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거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없다고 얘기하던 수십억의 존재에 대해, 있는 돈이라고 속이거나 혹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속였다면 철저한 사기꾼이었고,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면 과대망상증에 빠진 정신병자였었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여전히 돈은 나올 것이라고 주변에 얘기하고 있다고 하니, 이걸 뭐라 단정 지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H가 망가지는 과정에서 두 번째 큰 책임의 원인은 H의 아내였다. H의 아내는 H가 수십억이 곧 나온다고 했을 때 동조했고, 이를 통해 주변에서 돈을 빌릴 때 같이 읍소했다. 자라는 아이들을 생각했다면 H의 아내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남편을 무슨 일이든 움직여서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야 했고, 자신도 같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만약 H가 일을 하러 가지 않는다면 본인이라도 일을 하며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H가 여기까지 오게 된 원인에는 H에게 꾸준히 생활비를 빌려준 사람들도 있다. H에게 돈을 건넨 사람들은 대부분 한 번이 아니라 꾸준히 소액이든 큰돈이든 돈을 건넸는데 그 이유는 H의 아이들 때문에, 딱해서 등이었다. 주변에서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의 말을 들으면서도 곧 돈이 나올 거야라는 말에 동조하며 돈을 건넨 사람도 있었다. 간혹 선의로 베푼 행동과 애매한 동정은 '어떤 이에게는' 그가 현실로 돌아와 회복하는데 방해가 되곤 한다는 걸 나는 H의 상황과 변화를 보고 배웠다.
난 H를 비교적 젊을 때부터 오랫동안 만나왔는데, 지금은 만나지 않고 있다. 그의 허황된 생각은 주변을 망치고, 자신을 망쳤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처음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을 때 빨리 정신 차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면 나는 지금도 H를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