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팩남에게는 이미 독일 그녀가 있었다.
카운터를 보던 헬스장에서 본 식스팩남, 태산의 번호를 따는 데 성공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곧장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아까 인사했던 유미솔이에요.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었어요?’
금방 말풍선 옆 1이 사라졌다.
‘제가 지금 자전거를 타는 중이라서요, 손이 없는데 통화하실래요?’
나는 태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전거를 타는 태산과 침대에 누워 술에서 깨는 중인 나는 한 시간 정도를 통화했다. 태산에게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나는 그가 주도하는 대화에 맞장구치고 리액션하며 즐겁게 통화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버스카드를 따라 찍기에, 곧 공격하리라 예상했다고 말했다. 버즈를 빼 정리한 이유도 내가 공격했을 때 방어하기 위해서였다나. 나는 이 말에 아주 많이 웃었다.
“내일 공부 끝나면 같이 저녁 먹을래요?” 훈훈한 분위기를 빌어 내가 물었다.
“그래요. 내일 만나서 말씀드릴 거 다 말할게요.” 그런데 그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네? 말씀 주실 게 있어요?”
뭔데요? 그는 아, 만나기 전에 말씀드리는 게 예의려나? 하며 말을 시작했다. 여자친구는 없지만, 지금 독일에 못 잊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자기가 며칠 전에 공항에 데려다줬는데, 언젠가 다시 볼 것 같다고. 이사 오고 4년 동안 친구가 없었던 탓에 반가워서 이 말을 할 경황이 없었다고 했다. 태산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흔쾌히 번호를 주고 통화까지 즐겁게 하기에 태산도 내가 마음에 들었나 했더니, 잊지 못한 여자가 있다니. 아, 이 극악의 남자복이여… 그래도 티 내지 않고 밝게 말했다.
“그냥 동네 친구 만들었다 하는 느낌으로 만나요.”
“아, 네. 그러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냉모밀 좋아하신다 했으니까, 냉모밀 먹을래요?”
“저녁으로 먹기엔 너무 가벼운데. 저 술도 좋아하거든요, 술 좋아하세요?”
“네. 저도 술 좋아해요. 내일 마셔요.”
“그래요. 아직 그 못 잊은 사람 때문에 좀 힘드네요. 미리 말을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카톡이었다면 ‘ㅎㅎ’를 참 많이 붙이면서 대답했다.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날이 되었다. 그날 나는 공부 등 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였지만, 전부 제쳐두고 태산을 만날 준비를 했다. 입을 옷을 고르고, 얼굴에 화장을 하며 친구들에게 내가 남자랑 술을 마신다! 하는 카톡을 보냈다. 해가 지고 태산을 만났다. 나는 공들였지만, 눈에 띄게 공들이진 않은 ‘꾸안꾸 패션’을 하고 태산을 만났다. 회색의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딱 달라붙는 파인 상의에 걸친 셔츠였다. 이날 입은 상의는 이후 이어질 술자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나와 태산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 어묵탕, 닭꼬치를 시켰다. 나와 태산은 빠르게 술잔을 비웠다. 내가 그렇게 하도록 했다. 나는 빨리 반말이 하고 싶은데, 태산은 어색하다며 좀처럼 말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소 낯을 가렸던 태산도 술에 취하자 금방 오래 만난 친구처럼 굴었다. 아무래도 4년 동안이나 동네에 친구가 없었던 탓에, 내가 많이 반가운 듯했다. 나도 어색할까 봐 많이 걱정했는데, 태산이 대화를 이끌어주어서 편했다. 농담이 오가고, 서로에 대한 정보가 오가는 술자리가 무르익자 태산이 말했다.
“너는 네 어디가 가장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해? 나는 손.”
태산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손이 예쁘네. 손톱도 예쁘고. 태산이 너는? 이라고 다시 물었을 때, 나는 내 가슴을 가리켰다. 그때 태산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는 이제 더 이상 동네 친구 둘의 술자리가 아니라 남녀 둘의 술자리가 되었던 것은 기억난다.
술에 취한 나는 태산에게 자꾸만 술을 따라줬고, 술에 취한 태산은 자꾸만 그 술을 받아먹었다. 둘 다 몸 가누기가 힘들어졌을 때, 하지만 태산이 나보다 훨씬 더 몸을 못 가누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내가 앉은 소파 자리의 옆 부분을 팡팡 치며 말했다.
“내가 알려줄 테니까 여기 앉아 봐.”
태산이 비틀거리며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뾱’
나는 옆에 앉은 태산의 볼에 입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