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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솔 May 31. 2024

3화. 인생 첫 데이트, 식스팩을 가진 남자와.

내가 일하는 헬스장의 그 남자가 아니면, 그 애가 잊히지 않을 것 같아.

  가장 오랜 친구 하영에게 형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교를 향한 마음을 다 소진하려면, 아주아주 큰 사건이 벌어져야 하겠다는 얘기였다. 가령, 식스팩이 쩍쩍 갈라진 남자와 하는 술집 데이트 같은 사건 말이다.    


  나는 그해 여름 한창 한 아파트 단지에 딸린 커뮤니티 센터에서 카운터를 보는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그 커뮤니티 센터에는 독서실과 헬스장이 있었다. 나의 가장 주된 일은 헬스장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아파트 주민인지 확인하고 헬스장의 문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평일 오전 오픈 시간대 아르바이트라 그런지, 헬스장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새벽에 운동하러 오는 직장인, 오전에 시간이 비는 중년과 노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갑내기 남자가 헬스장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동갑인지는 어떻게 알았냐면, 회원 번호가 생년월일이었다. 그걸 봤다) 처음엔 드물게 평일 오전에 한가한 동갑이다… 정도의 감상만 있었다. 그의 식스팩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내가 앉은 카운터의 바로 앞에는 유리창 너머로 런닝머신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날따라 의문의 동갑남이 유산소를 하는 날이었나보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를 보았는데, 그가 런닝머신을 뛰고 있었다. 땀을 뚝뚝 흘리던 그는 갑자기 입고 있던 민소매 티를 들어 올려 이마의 땀을 닦았다. 훤히 드러난 그의 배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둘투둘 선명한 식스팩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엄마야. 내가 감탄했다.     


  결국 그가 런닝머신을 다 뛸 때까지 그를 변태같이 바라봤다. 두 시간 정도를 뛴 그는 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가 앉은 카운터를 지나 커뮤니티 센터의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처음으로 목격하는 엄청난 남성미에 매료되어 그가 걸어 나가는 동안 곁눈질로 그를 열심히 눈에 담았다. 나는 바로 그의 회원 정보를 훔쳐봤다. 그의 이름은 태산. 그는 그 길로 의문의 동갑남에서 태산이 되었고, 그가 보통 출몰하는 정오쯤이면 태산이 올까? 궁금해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르바이트라도 직업윤리가 있는 법. 아파트 주민들의 윤택한 커뮤니티 센터 이용을 위해 일하는 내가 아파트 주민에게 사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또 그때까지는 형교에 대한 마음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여름에서 늦여름이 되었고, 늦여름에서 초가을이 되었다. 나의 카운터 아르바이트 퇴사가 결정되고 맨투맨을 입을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몽골 해외 교류 프로그램 멤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하나 생겼다. 그 자리엔 형교도 있었다. 자리가 파하고 뒤풀이로 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갔다. 500짜리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이걸로 형교와는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버스에 타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헬스장 의문의 동갑남, 태산이 버스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앉아있던 좌석의 뒷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가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아파트 단지에서 버스 카드를 찍고 내리려는 모습을 보고 그가 맞다고 확신했다. 내가 내릴 정거장은 몇 정거장 남아있었지만, 따라서 버스 카드를 찍었다. 술기운에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이다. 그는 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귀에서 버즈를 빼 정리했다.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 그쪽이 다니는 헬스장 카운터 보는 사람이에요. 혹시 저 아세요?”

  “아뇨, 기억이 잘….”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헬스장에서 일해요. 이렇게 만나네요.”

  태산이 멋쩍게 웃었다.     


  “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니요. 없어요.”

  “그럼 번호 좀 주실 수 있으세요?”

  술에 취한 나는 용감했다. 눈 딱 감고, 죽기 아님 까무러치기로 그에게 번호를 물었다. 그는 아, 예. 드릴게요. 하며 내 핸드폰에 그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했다. 집이 여기세요? 돌아서는 내게 그가 물었다. 15분 정도 더 걸려요. 그냥 따라 내렸어요. 내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술김에 나온 웃음이기도 했고, 첫 번호 따기에 성공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아까 인사했던 유미솔이에요.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었어요?’     

  금방 말풍선 옆 1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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