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교사와 함께 하는 수업성장 기행'에 다녀왔다. 그 전날까지는 날씨가 좋았는데 당일이 되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였다. 약속된 장소에 집결을 한 후 버스를 타니 그림책이 먼저 반겨주었다. 바로 김용택 시인의 동시 그림책들이었고 3권 중 한 권을 골랐다. 내가 고른 '할머니 집에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그림책이 너무나 따뜻하여 내 마음까지 몽실몽실해졌다.
이번 기행의 첫 번째 일정은 김용택 시인과의 만남이었다. 옆에 앉은 동료교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밌게 하다 보니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에 금방 도착하였다. 해가 비치는 날도 좋았을 테지만 비가 내리는 날도 공기가 깨끗하고 운치가 좋아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조금 걸으니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였다. 작가님이 나고 자란 집을 재건축하여 만든 곳이었다. '회문재'라는 이름의 작은 한옥 집으로 '글이 돌아오는 집, 글이 모이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가는 길에 보이는 아주 커다란 느티나무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돌담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분홍낮달맞이꽃도 비를 머금은 채 우리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우산을 접어 한편에 놓아두고 한옥 툇마루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 나니 그때서야 김용택 작가님이 눈에 들어왔다.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작가님은 동그란 안경을 쓰고 계셨고 목에는 돋보기안경이 걸려있었다. 산신령 눈썹을 가진 편안한 인상의 작가님을 뵈니 이웃의 친근한 아저씨처럼 느껴져 좋았다. 자리가 어느 정도 정돈된 후 작가님이 입을 여셨다.
"임실 하면 뭐가 제일 유명하죠?"
"치즈요!"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임실 하면 뭐가 유명하죠?"
"김용택 작가님이요!"
"사고를 빨리 전환을 하는 게 참 좋네요!"
가벼운 농담에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 듯 보였다.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 불리는 이 한옥집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초등 교사가 단체로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30년 넘게 초등교사로 지내신 작가님도 우리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셔 내 마음의 문도 더 빨리 열렸다. 사실 작가님들을 눈앞에서 보기만 해도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기는 한다. 더 솔직히 말하면 보기도 전에 문이 열려 있기도 하는데 오늘의 만남 역시 그러했다.
작가님께서 먼저 '회문재(回文齋)'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30년 넘게 덕치초에서 근무하셨고 그중 26년을 2학년 담임을 맡으셨는데 덕치 초등학교 근처에 회문산(글이 돌아오는 산)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집 이름을 이렇게 멋지게 지으셨나보다.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와중에 친구 따라 초등교원양성소에 들어간 후 초등교사가 되셨다고 한다. 이때 교사들만 할 수 있는 질문을 어떤 선생님께서 하셔서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한 학교에서 30년 넘게 근무를 하셨나요? 인사이동이 없었나요?"
"그동안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 역시 선생님만 하는 질문이 재밌네요. 처음에 임실초에 5년 있다가 다른 곳에서 1년 근무를 했습니다.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덕치초에서 5년 있다가 다른 곳에 잠깐 있다가 또 덕치초로 오고 이런 식으로 근무하다가 덕치초에서 오랜 기간 근무를 하고 퇴직 할 수 있었습니다. 덕치초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원하는 곳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었네요."
한 반에 3명 정도 있었던 작은 시골 학교라 가능하였던 것 같다. 정해진 대본도 없고 파워포인트 자료도 없이 우산과 마이크만 들고 강의하시는 작가님께서 의식의 흐름대로 말씀하시는 중 요즘 교사들의 고충도 헤아려주셔서 감사하였다.
"요즘은 한 반에 몇 명 정도 있습니까?"
"20명 정도 있습니다."
"저는 3명만 가르쳤는데 3명만 있으면 하나도 안 힘들 것 같죠? 똑같이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고 힘듭니다. 허허! 그런데 요즘에 더 많이 힘드시죠?"
작가님께서 처음 시를 쓰게 된 이야기도 매우 재밌었다. 22살 때 책을 돌아다니며 파는 사람에게 월부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샀는데 그때부터 맨날 보던 산이 다르게 보였다고 하셨다.
"새롭게 보이면 사랑입니다. 여러분도 연애할 때 세상이 달라 보였죠? 저도 그때 전집을 몇 날 며칠이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읽었습니다. 지금도 책을 읽으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책이 되고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저절로 쓰게 되어서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멋있다. 작가는 타고나는 것인가? 나도 어렸을 때 엄마가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는데 앞부분만 좀 보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전집 앞에서 질려 버렸던 나와는 달리 김용택 작가님은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그 어려운 책을 다 읽었다니 정말 대단하였다.
첫 번째 시집을 출간하는 과정도 매우 흥미진진하였다. 동료 선생님이 우연히 작가님이 써놓은 시를 보고 투고를 해보라고 하셨다. 출간을 해보자는 내용의 엽서가 2달 뒤에 도착하였단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 가득한 장면이다. '창작과 비평'이라는 아주 거대한 출판사에서 작가님의 사진을 보내라고 했는데 강가를 배경으로 인물이 매우 작게 나온 사진을 보냈더니 다시 보내라는 에피소드도 나에겐 감성 그 자체였다.
몇 달 후 책을 받아보고 여러 시인 중 맨 뒤에 나와있는 본인의 시를 차마 바로 보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떨림이 전해졌고 '내가 지은 시에 내가 감명을 받았다'는 표현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때 당시 교사월급이 12만 원이었는데 원고료를 9만 원이나 받아서 놀라 그 뒤로 더 열심히 쓰셨다고 해서 부럽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요즘 교사들의 삶이 힘들어도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래도' 초등교사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많으니 힘을 내라고 하셨다. 본인은 동시과 글쓰기로 요즘에도 아이들과 지낸다고 하셨다. 학교에서 시나 글을 쓰라고 하면 너무 예쁜 말만 쓴다며 안타까워 하셨다. 우리가 하루 종일 하는 일에서 전환이 필요함을 말씀해 주셨다.
"전환을 위해 나도 날마다 4가지를 생각하고, 4가지를 아이들에게 생각하게 합니다. 이 4가지를 생각하게 하면 아이들이 전혀 다른 글을 씁니다. 기존에 썼던 예쁜 말들만 있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글을 씁니다. 첫째,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뜰 때 무엇을 먼저 보았는가? 이때 어떤 아이들은 천장을 먼저 보았다고 합니다. 둘째,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이 났는가? 어떤 생각이든 다 좋습니다. 셋째, 처음 듣는 말은 무엇인가? 보통은 부모님 잔소리로 시작이 되죠. 넷째, 처음으로 무엇을 했는가? 이 4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의식하면 사고의 전환이 생겨나며 이를 '시'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최근 김용택 시인을 만난 중학생의 시를 들려주셨다. 엄청난 시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현실을 잘 드러나게 해주는 시라고 극찬과 감탄을 감추지 않으셨다. 5줄밖에 안된 시를 중학생 아이가 썼는데 모든 게 들어가 있어 작가님이 엄청 놀라셨다고 하셨다. 칭찬만 너무 하시고 빨리 들려주지 않아 너무 궁금했는데 듣고 나서 내 입에서도 짧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예쁜 말만 가득한 여느 시와는 확실히 달랐다. 흉내 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쓴 중학생 아이의 얼굴도 궁금하였다. 특히 1행의 '늦게'는 나중에 덧붙인 내용으로 아빠의 힘듦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때 저 멀리서 청량한 새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꾀꼬리였다. 새 사진을 보여주셔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노란색의 아주 예쁜 새였다. 이 꾀꼬리가 나무에 올라와 한참을 있다가 갔다. 도심에서는 이런 여유가 없었는데 비 오는 소리도 꾀꼬리 울음소리도 멍 때리기 참 좋았다.
"제가 2학년 녀석들 3명을 가르칠 때 하루 중 가장 많이 보는 나무를 정하게 했습니다. 아무리 3명이라도 일주일이나 걸려요. 말을 겁나게 안 듣습니다. 일단 본인의 나무를 정하면 아침에 한 번씩 보고 오게 합니다. '나무 보고 온 사람?'이라고 물으면 안 보고 옵니다. 그래도 날마다 물어봅니다. '네 나무가 무엇을 하고 있던?'처럼 같은 나무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물어보면 관심이 생깁니다. 어떤 날은 새가 앉았다가 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뭇잎 색이 변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뭇잎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을 글쓰기로 이어지게 하면 됩니다."
나도 우리 반 23명의 아이들에게 해보고 싶었다. 3명의 아이들도 자기 나무를 정하는데 1주일이 걸렸다고 하니 우리 반 아이들은 나무 정하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리려나?
"딱새, 직박구리, 물까치, 꾀꼬리 등 어떤 새가 나무에게 놀러 왔는지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이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교사가 하나를 알려주면 아이들이 다른 것들을 보게 되고 열을 알게 되면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되는 것입니다."
보고, 생각하고, 듣고, 말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면 한 편의 글쓰기가 된다는 마법 같은 말씀도 해주셨다. 일상의 꾸준함이 결국 기적과 같은 일을 만드는 것이다. 반복 속에서 지루함을 견디고, 견디는 것을 넘어 즐기게 되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힘을 가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들은 실수를 하며 성장하고, 실수를 하니까 아이들이라는 말씀에서 좀 더 유연하고 온화한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먹는다. 아이들이 잘 자라고, 나무를 사랑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내용에 조금이나마 작은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였다.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고등학생인 우리 아들과 배불뚝이 중년의 남편에게 잔소리를 줄여야겠다고 다짐도 하였다.
작가와의 만남이 끝난 후에도 그림책에 일일이 사인을 해주시고 사진도 찍어주셔서 감사하였다. 책만큼이나 소탈하고 따뜻한 김용택 작가님과의 만남이 분홍낮달맞이꽃, 꾀꼬리, 느티나무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이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