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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소음의 정체

by 느긋

일요일 오후 한가로이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데 위에서 갑자기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쿵쾅거리는 소리 안 들려?"

"어?"

둔감한 성격을 지닌 남편은 내가 들은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TV 소리를 줄이니 쿵쾅거리는 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어? 정말 들리네?"

누군가 막 뛰었다가 3-4초 조용했다가 막 뛰는 게 계속 반복되는 소리였다.

"이거 위층에서 나는 소리 맞지?"

"응, 맞아."


위층에는 두 분 모두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신 부부만 사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평소에 생활소음을 거의 내지 않는 분들이라 의아했다. 다행히 저녁 8시 이후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퇴근 후 소파에서 쉬는데 또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쾅 거리는 소리 들리지?" 옆에 있는 아들에게 물어봤다.

"응, 들리는데 괜찮아!" 내일이 시험인데 시험공부는 안 하는 아들내미가 참으로 천하태평하게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누가 왔나? 왜 이렇게 뛰어다니지?" 어제와 같은 소음이 나의 휴식을 방해하였다. 패턴은 우당탕탕 뛰었다가 조금 쉬었다가 다시 우당탕탕 뛰는 소리였다. 위층에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30년이 훨씬 넘은 아주 오래된 아파트로 위층에 사는 분들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분들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친정집과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집을 얻어 산지 10년이 넘었으므로 우리 아이가 커가는 모습도 본 분들이다. 더욱이 몇 년 전 윗집에서 누수가 생겨 우리 집 천장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전화번호도 교환을 한 적이 있던 터라 크게 교류는 없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항상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는 정다운 이웃이다.


이사 온 후 처음으로 느껴본 층간 소음에 당황하기도 하고 소음의 근원지가 위층이 맞는지 궁금하여 연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불편한 내용이라 너무 직접적인 전화보다는 문자가 편했는데 보낼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Chat GPT에게 물어보았다. 역시나 만족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위에서 층간소음이 갑자기 들려. 평소에는 노부부 두 분만 사시는데 며칠 전부터 계속 뛰는 소리가 들리네.
손자가 왔는지 문자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기분 안 나쁘게 물어볼 수 있을까?

이웃분께 기분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여쭤보려면 걱정하는 마음과 확인 차원이라는 뉘앙스를 담는 게 좋아요. 직접적으로 '시끄럽다'는 표현보다는 평소와 달라서 혹시 무슨 일인지 묻는 방식이 무난합니다.


제시해 준 예시 1,2,3을 섞어 아내분께 문자를 보냈다.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셨으니 호칭은 교장선생님으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만나면 거의 물어보시진 않지만 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를 물어보시거나 간단하게 스몰토크를 하고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도 잘 아셔서 이게 나에게도 편했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10층인데요. 어제부터 갑자기 위에서 누가 계속 뛰는듯한 소리가 엄청 크고 자주 들려서요. 평소에는 매우 조용했는데 갑자기 안 들리던 소리가 나서 좀 염려가 됩니다. 혹시 11층 소리가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문자를 잘 확인하지 않으시는지 바로 답장은 없었다. 신경 쓰이는 소음은 지속되었지만 어느 순간 저녁 8시 30분이 넘어가니 잠잠해졌다. 소음에 대해 잊고 있었는데 저녁 9시가 넘어서 위층에 사시는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위층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우리가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우리 집에 손자가 와있어서요. 13개월짜리 손자인데 아직 엄청 잘 뛰지는 못하는데 캐리어를 엄청 끌고 다니네요. 정말 미안해요."


역시, 위층에서 나는 소음이었다.


"아~ 손자가 왔어요? 13개월이면 너무 예쁘겠네요."

"남편이랑 이야기하면서 아래층이 너무 시끄러울 것 같다고 걱정했어요."

"혹시 손자를 아예 봐주시기로 하신 건가요?"

"아니~ 추석 때까지만 우리 집에 있기로 했어요. 잘 걷지도 못하는데 계속 캐리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네요. 미안해요."


추석 때까지 라니 다행이다.


"아이고, 그랬군요! 맘껏 뛰라고 하세요."

"진짜 미안합니다. 저녁 8시 정도에는 자요."

"괜찮습니다. 평소에는 엄청 조용한데 갑자기 소음이 들려서 연락드렸어요."

"미안합니다."

"아~ 네!"


궁금증이 풀렸고 내 예상이 맞았다. 다행히 아기가 일찍 잠자리에 들고 낮에는 우리 집에도 사람이 없으니 퇴근 후 조금만 그것도 며칠만 좀 참으면 된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제일 예민한 사람으로 우리 집 남자들인 남편과 아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으니 내가 이해가 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곧 있으면 추석인데 이 며칠도 참지 못할 정도로 예민보스는 아니다.


13개월 아기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걸음마 연습을 하는지 뭔가를 끌고 다니는 것 같은데 필시 건강한 아기일 것이다. 쿵쾅쿵쾅 발 힘이 장난 아니다.


만약 내가 위층에 문의하지 않고 욕만 해대고 참았으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을 것 같다. 하지만 궁금증이 풀렸고 덕분에 며칠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 집을 방문한 아기가 만들어내는 소음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 또한 우리 집에서 나는 생활소음을 아래층에서 이해해주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이 정도는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평소 이웃끼리 큰 왕래는 없지만 내 이웃이 누구인지 알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정도가 참으로 감사하기까지 하다.


평소 엄청 조용한 위층이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활기차고 따뜻한 일상을 누리고 있을 노부부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운이 좋다면 엘리베이터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기 얼굴도 한번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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