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달리기 할까? 다들 시간 어때요?"
친구들 단톡방에 톡이 올라온다. 안 그래도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내가 먼저 답을 한다.
"내일 달리기 좋아!"
지난 주말에 한 여행의 여독이 풀리지 않은 J는 내일 달리기에서 본인은 빼주라고 한다. 달리기를 제안했던 친구 R이 J에게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
"그럼 뛰지 말고 뒤풀이 때 올래? 우리 오랜만에 맥주 한잔 하자!"
다들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흔들린 J는 뒤풀이에만 참석하기로 약속을 했다.
갑작스럽게 다음날 저녁 모임이 만들어졌다. 다들 러닝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저만치 던져버리고 저녁 먹을 때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각인 7시까지 시간이 남아 나와 다른 친구 D 둘만 약속 장소와 가까운 근처 대학교에서 달리기를 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퇴근을 하고 집에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피곤함이 급격히 몰려와 괜히 달리기 약속을 했나 싶었다. 달리기 약속을 펑크 낼 핑계를 찾고 싶었지만 저녁만 먹어도 되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D에게 달리기 제안을 한 터라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피곤할 때 운동하면 독소가 쌓인다던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달리기 장소로 무거운 몸을 이끌었다.
몸을 풀고 있으니 저 멀리서 D가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온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얼굴이다. 러닝벨트 하나만 맸을 뿐인데 D가 나에게 완벽한 달리기 복장이라며 칭찬을 해주었다.
"몸은 풀었어?"
"달리기 하면서 몸 푸는 거 아녀?"
나도 달리기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D는 나보다 더하다. 몸도 안 풀고 달리기 할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다. 그전에 배웠던 몸풀기 동작을 D에게 알려주니 신세계를 맛본 듯 신기해하며 잘 따라 한다.
몇 개월 전 러닝 붐이 한창 불던 봄날, 친구들이 마라톤 5km에 한번 도전해 보자고 하여 별다른 고민 없이 신청했다. 신청할 당시에는 매우 먼 일이라 생각하며 조금씩 준비하면 되겠지 했는데 10월에 있는 마라톤 대회가 이제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달리기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한창 살아있을 때 운이 좋게도 친구 R의 지인으로부터 달리기 자세에 대한 코칭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은 러닝 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하시고 마라톤 풀코스 완주 이력도 가지고 계셨다.
총 2번의 코칭 받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 동적스트레칭을 알려주셨다. 내 몸에 달리기를 한다는 신호를 주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기존에 했던 정적스트레칭도 중요하지만 몸에 열을 좀 내주는 워밍업을 위해 동적스트레칭 동작을 따라 해 보았다. 주변에 보이는 아무 기둥을 잡고 골반을 풀어주기 위해 다리를 앞뒤로 20차례 높게 흔들어주었다. 같은 방법으로 다리를 옆으로 20차례 높게 흔들어 주었다. PT체조도 10회 하고 다리를 한쪽씩 들어 올려 허벅지 아래로 손뼉을 치는 동작도 10회 했다. 달리기를 하기도 전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몸이 풀린 후 한번 달려보았다. 코칭을 해주는 분이 속도를 내지 말고 천천히 뛰라고 하셨다. 국민학생 이후로 달리기를 거의 하지 않았던 몸이라 달리는 게 조금 어색하였다. 달리는 동작을 보시면서 여러 팁들을 알려주셨는데 초보자인 나에게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몸통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팔이 다른 쪽 몸통으로 넘어가지 않게 팔을 많이 흔들지 마세요. 팔을 많이 흔들면 필요 없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므로 주의하셔야 합니다. 사람마다 전문가마다 다르긴 한데 미드풋을 하시라고 말씀을 많이 드립니다. 발바닥에서 제일 두꺼운 부분이 바닥에 먼저 닿는다는 느낌으로 뛰면 좋습니다. 그리고 통통 뛴다는 생각으로 뛰어보세요!"
생각보다 통통 뛰어지지 않았다.
"오른쪽 골반이 바깥쪽으로 더 많이 벌어지네요. 선에 양쪽 엄지발가락들이 모인다는 느낌으로 일자로 뛰어보세요!"
말을 듣고 내 발을 보니 정말 오른쪽 발이 더 바깥으로 향해있었다. 이를 의식하고 자세를 다듬으니 훨씬 좋아졌다는 피드백이 온다. 첫날에는 3km만 뛰어서 생각보다 버틸만하였지만 5km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훈련을 할수록 나름 자신감이 생겨났다. 5km 마라톤에 접수 해놓은 상태라 나름대로 동네 운동장에서 혼자 틈틈이 연습하였다. 매우 천천히 뛰니 할만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기억을 살려 매우 천천히 달리기를 하였다. 몸이 피곤한 상태였기에 내가 과연 목표했던 5km를 뛰고 기분 좋게 저녁 모임을 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들긴 했다.
스마트워치에서 운동 기능을 켜고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시작부터 몸이 무거웠지만 트랙 반바퀴를 돌 때쯤 녹음이 가득한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외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덕분에 피곤함도 조금씩 달아나는 듯하였다.
달리기에만 집중하기 위해 음악을 듣지 않고 뛰는 것을 좋아한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자연스럽게 내 귀에 들어오니 음악이 없어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대운동장 안에서 학생들의 풋살 훈련하는 소리를 들으니 젊음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4-5살짜리 꼬마아이가 장난치다가 넘어져 으앙~하고 울음이 터지는 귀여운 소리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한쪽에서는 웨딩포토를 찍는 젊은 예비부부가 즐겁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담긴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기타를 치며 아직은 더운 가을 공기를 느끼는 사람들을 보니 낭만 그 자체로 가득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음악을 듣지 않으며 달리기를 하는 나에게 누군가 '그건 가족의 복수를 위해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했다. 너무 웃겨 빵 터졌던 기억이 있다. 달리기 자체가 나 자신과 하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게 팽배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달리기를 하면서 나와 대화도 할 수 있고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도 들여다보며 정리할 수 있는 게 참 좋다.
달리기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조깅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달리기의 매력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번에도 친구 D와 달리기를 함께 하기로 하였지만 저마다 페이스가 다르므로 정작 같이 뛰지는 않는다.
"나는 엄청 느리게 달려. 8분대 페이스로 뛰어."
"그럼 각자 뛰고 45분 후에 벤치 앞에서 만나자!"
"오케이!"
시간이 흐를수록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느리게 달리는 사람도 있다. 1km마다 스마트 워치에서 시간과 페이스를 알려주었다. 역시 8분대로 매우 느린 편에 속한다. 그 와중에 나와 페이스가 맞는 사람을 만나 나름대로 발을 맞추어 본다. 점점 느려질 수 있는 나의 발이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 발과 맞추어 뛰었다. 페이스가 유지되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운동선수들에게는 페이스메이커가 중요한가 보다라는 생각도 머릿속에 스쳐간다.
내가 뛴 대학교의 트랙이 400m여서 12바퀴 정도를 뛰었다. 친구 D는 본인 운동이 다 끝나서 미리 약속된 장소인 벤치에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위해 마지막 한 바퀴는 포기할까 생각도 들었지만 4.6km와 5km는 천지차이다. 결국 목표했던 5km를 뛰고 친구에게 걸어가니 대단하다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5km를 한번도 쉬지 않고 뛴 후 친구에게 걸어가는 길에 다리는 무거웠지만 마음은 어떤 때보다 상쾌하고 가벼웠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서 마음 깊숙이 올라오는 그 뿌듯함과 희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친구와 함께 예전에 배운 대로 햄스트링을 쭉 늘리는 정리 운동을 한 후 저녁 장소로 향했다. 오늘의 메뉴는 매콤한 맛이 일품인 아귀찜이었다. 기본 반찬으로 나온 묵사발과 샐러드는 허기진 내 배를 달래기는 커녕 마중물처럼 식욕을 더 돋웠다. 아귀찜과 곁들어 나오는 들깨 수제비는 정말 최고의 궁합이었다. k 디저트인 치즈누룽지 볶음밥으로 마무리까지 완벽하였다.
배는 불렀지만 자고로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법! 근처 빙수 가게로 장소를 옮기고 친구들과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짠 음식을 먹은 후에 시원하고 달콤한 망고빙수는 세상 근심을 다 잊게 만들 정도로 맛있었다. 러닝을 하고 나니 식욕이 더 돋아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달리기 후 물만 딱 마셨으면 다음 날 몸무게 숫자에 만족을 했을 게 분명하지만 현재의 단순하고 감사한 삶을 선택하여 결과적으로 매우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씻고 침대에 누었다. 놀 때는 몰랐던 피로가 몰려와서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워치에 찍힌 나의 수면 점수는 88점으로 '매우 좋음'이었다.
요즘 러닝 열풍의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잘 살아가고 있구나! 살아있는 기분이라는 게 이것이구나! 를 깨닫게 해주는 게 가장 크다. 뛸 때만큼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다는 아니지만 조금은 사라진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본인만의 속도대로 달리면 부상의 위험도 매우 적어진다. 달리기를 할 때 누군가 나를 추월했다고 해서 조급할 필요가 없다. 내가 누군가를 추월했다고 해서 우월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세상 일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세상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더욱 어렵다. 하지만 자신만의 속도대로 묵묵히 남과 비교하지 않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본인이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 이때 흘리는 땀의 뿌듯함은 흘려본 사람만이 잘 알 수 있다. 욕심부리지 않고 나만의 속도를 지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달리다 보면 5km 마라톤도 인생마라톤도 마음 편히 완주할 것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