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가르친 지 십 년쯤 됐을 무렵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 결과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아동미술에 대한 글은 진작부터 쓰고 싶었다. 교보에 가서 보면 ‘아동미술’ 분야가 따로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물어서 찾아본다. 아동미술에 관한 고전적인 교육서나 미술 실기에 관한 책은 많지만, 현장의 이야기는 드물다. 한 번 써 볼까.... 아니다. 쓸 만한 사람이 쓰겠지, 하고 돌아서기를 몇 차례. 내 생각에 나는 늘 무기력하고 마음이, 정서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글에서 드러날까 봐.
최근까지도 서울에서 가장 큰 서점에, 아동미술에 관한 섹션은 따로 없다. 아동미술 현장을 얘기하는 책이 여전히 드문 것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달싹거렸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경험한 것들을 써 봐야겠다. 아동미술이 왜, 어떻게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글을. 아동미술을 구실로 내 얘기를 하고 싶기도 했다. 왜 내 얘기가 하고 싶은지 이유를 묻는다면 그건 잘 모르겠다. 유년의 고독이 개인의 인생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지배할 수 있는지 말하고 싶었나? 그러니까 왜. 왜 그 얘기를 하고 싶었냐고. 그러한 의식도 무의식도 그림으로 드러난다는 것. 어린아이일수록 방어도 없이 거짓도 없이 보여주니까, 아이들의 그림 표현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그것만큼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림으로 하는 표현은 언어와 달리 방어가 어렵다.
일 년에 한 차례 정도는 제주도에 가게 된다. 침 맞으러 자주 다니던 한의원이 있다. 이번에 가서 진료받으며 들은 말씀은, 사람이 안에서 뱉어 내고 싶은 게 있는데 못 뱉어내면 안에서 쌓여 병이 된다고. 그게 가래든 기침이든 어떤 감정이든 하여간 뭐가 됐든 간에. 사랑을 참으면 상사병이 되고 분노를 참으면 화병이 되겠지. 이 원장님은 작은 목소리로 항상 소곤소곤 말씀하시는데 평소엔 잘 안 들려서 매번 흘려듣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엔 귀에 쏙 들어왔다. 아, 나는 뱉어내고 싶었구나. 가슴에 굳은살이 배긴 것 같은 상처를. 통증은 무뎌졌지만, 흔적은 두꺼워진 상처를. 탑처럼 쌓인 분노를. 나를 평생 괴롭히는 것들을.
나는 유년의 여러 날 동네 그네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햇볕에 달궈진 정수리와 녹슨 쇠사슬은 고독한 오후를 더욱 지루하게 만들었다. 훗날, 예상치 못하게도 이 외로웠던 아이는 또 다른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들의 그림에서 유년의 나와 다르지 않을 마음이 읽혔다. 그맘때 내 상처가 들여다보였다. 내가 만약 아동기 때 동적 가족화를 그렸다면. 스트레스 진단화를 그렸다면 또 학교 생활화를 그렸다면. 이 아이들의 그림과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나 예뻐하고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엄마가 자식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애정과는 별개로 내게 새겨진 상처가 있다. 「일곱 살짜리의 고독」은 그렇다고 말한다. 아이의 작아진 마음이, 깊은 상처가, 내색하지 않는 쓸쓸함이 그림으로 그려진다고. 그림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아이들이 다 커버리기 전에 그 마음을 얼른 안아서 토닥여줘야 한다고. 아이의 유년이 공허함으로 가득 찬다면. 혼자 서 있어야 할 어른이 되었을 때 꺼내어 위안 삼을만한 구슬을 만들 수 없다. 정서적 빈 주머니를 가진 자아로 평생 살아가야 한다. 내가 그렇게 살아 봤더니 너무나도 외롭고 고독했다.
어린아이들은 말이나 글로 자유로운 표현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즐겨한다고 했다. 어른에다가 전공까지 한 나는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어렸을 때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면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그렇다. 나는 무기력한 가운데에서도 글로써 뱉어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죽지 않는 이상 살아내야 하므로. 아이들은 내게 물었었다. 선생님은 무슨 꿈을 가지고 있었냐고. 나는 대답하기 어려웠었다. 꾸던 꿈이 멀어져서 병이 생겼었다면 앞으로 꾸는 꿈으로 나는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림이 아니어서 서운하지도 않다. 글이라서 더 좋을 것도 아니다. 뭐가 됐든 뭐가 중요한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될 것 아닌가? 나는 병들지 않은 채로 살아내고 싶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