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관에 봉착했다. 첫 교습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일곱 살 현지는 위로 나이 차이 나는 언니가 셋이나 있는 아이였는데 늦둥이 막내라 아버님이 유독 예뻐하신다고 했다. 현지가 그림을 시작한 지 좀 지나서 뭔가 예사롭지 않음이 감지됐다. 취학 전 연령인 걸 감안하고도 뭘 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이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늘 그게 그거였다. 화지 가득 동그라미 세모 네모 같은 도형 형태로만 반복해서 채워지고 있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형태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주제로 그림을 그리더라도 결과는 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현지에게 뭘 그린 건지 얘기해 줄래 물어보면 아이는 조잘조잘 열심히 설명해 줬다. 이건 ---구요, 이건 --예요. 내 눈엔 그저 동그라미 세모 네모의 변형일 뿐인데 아이는 각각의 도형 형태의 그림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린 것이었다. 항상 비슷한 그림을 그리면서 지겨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지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어린아이지만 자존심이 좀 센 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본인도 자기 그림이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알지만 자존심상 티를 안 내는 건가 하는 의심도 해 봤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접근해야 한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손을 댈 수 없었다. 미술 실기를 지도하는 교습소지만 아동미술은 실기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과 그 벽을 피부로 느끼게 된 계기였다.
때마침 학원에 광고 전단이 날아들었는데 아동 발달 전문 클리닉이었다. 당장 전화를 해서 현지에 대해 문의했다. 한 번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겠다는 예상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현지 어머님께 말씀드렸고 현지는 검사를 받았으며 몇 가지 진단이 내려졌다. 20년도 더 된 일이라 정확한 진단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좋지 않은 결과였다. 현지 아버님은 쓸데없는 검사를 해서 멀쩡한 애를 ㅇㅇ 만들었다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한다. 현지는 곧 그만두었다. 생일 관계상 학교를 다음 해에 보내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현지 아버님은 오히려 바로 보내 버리셨다는 얘기를 피아노 학원 원장님을 통해 전해 들었다. 현지가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아주 힘들 것으로 예상되어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아이의 상태가 이러하고 전문가와 상담해 보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을 때 나오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학원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아이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든지. 이런 권유를 해야 할 경우가 생겼을 때 모른 척할 수도 있기는 하다. 아이의 미술교육보다는 부모님 퇴근 시간까지 ‘맡겨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당장 미술학원에서 하는 그림 수업도 문제지만 학교에 가서 아이가 모든 수업에 적응 못 할 게 뻔한데 스케치북만 넘기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교습소 운영 초기 이렇게 난감한 경험을 통해 미술치료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아이들을 살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그것은 내 일에 대한 양심과 자존심과 자긍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 당시 현지가 그렸던 그림들은 사진으로 남아 있지 않다. 아래 그림은 8세 남자아이의 그림으로 현지가 그렸던 그림들과 매우 비슷하다. 이 두 아이 그림은 이런 비슷한 형태 외에 색깔을 알록달록하게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경계선 지능에 근접한 상태로 보이는 아이들 그림의 공통점은 무엇을 그리든지 연령에 비해 표현이 단순하고 비슷한 형태가 반복되면서 나열하는 것이다. 내가 본 바로는 그렇다.
풍선/ 단순하고 동일한 형태를 나열
각기 다른 주제의 그림이지만 비슷 비슷한 느낌
도형 형태가 반복되고 나열하는 식으로 화지를 채움
영민이는 2학년 남아다. 얼굴에 나는 장난꾸러기라고 쓰여 있는 아이였다. 평소 수업 시간에 차분히 앉아서 집중하는 걸 힘들어하는 편이었다.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모른다고 즉답했다. 뭐 그려보고 싶니, 주제 목록에서 골라보자. ‘몰라요.!’ 이건 뭘 그린 거니 해도 ‘몰라요!’ 뭘 얘기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몰라요!’였는데 얼핏 보면 버릇없이 구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하루는 영민이의 '몰라요.' 하는 모습에서 뭔가가 달리 느껴졌다. 그 ‘몰라요’가 단순히 그림이 그리기 싫어서 내지는 버릇이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영민이가 미술 수업을 즐기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미술학원에 오는 것 자체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학원에 와서 앉아 있는 것 자체를 괴로워하는 경우엔 특유의 행태가 있는데 영민이는 해당하지 않았다. 진짜 아무 생각이 없는 ‘몰라요.’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저렇게 물어보고 대답하는 걸 유심히 관찰했다. 보통 선생님이 질문하면 생각해 보는 과정을 거쳐서 ‘몰라요.’가 나와야 하는데 영민이는 선생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몰라요.’라고 즉각적인 반응을 했다. 그것도 굉장히 빠른 말투로. 뭐든지 모르겠다는 영민이의 그림 역시 연령에 비해 표현이 아주 단순했다. 유치부 수준의 그림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놀이 미술도 즐기지 않았다. 놀이미술을 할 때는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시작하는데 영민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가 어려우니 자꾸 딴짓하려고 하고 손을 많이 써야 하는 놀이 미술을 즐기지 않았다. 소 근육 발달이 덜 되어 손놀림을 자유자재로 놀릴 수 없어, 하다 보면 짜증이 나서일 수도 있었겠다. 놀이 미술 시간에는 가위나 조각칼, 스테플러, 글루건, 우드락 커터기등 여러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은 이것저것 사용해 보는 것을 즐기지만 영민이는 그 또한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략의 파악을 하고 나니 영민이의 상태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영민이 어머님께 상담 요청을 하고 전문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다행히 영민이 어머님은 빠르게 움직였고 검사 결과 여러 가지 진단이 나왔고 나에게 공유해 주셨다. 경계선 지능 장애는 IQ 70~84 사이의 수치에 해당하는데 영민이는 IQ 80대였고 다행히 정상 범주에 속하는 수치였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게 어렵고 소 근육 미발달 상태였다. 개념을 추상화시키는 작업이 안 되는데 상상화를 재미있게 그릴 수는 없다.
또 수 개념이 없는 아이의 그림에서는 어떤 특징이 보일까. 다은이는 7살이지만 언어도 동작도 대체로 발달이 느린 아이였다. 희로애락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천둥번개가 치면 너무 놀란 나머지 세 살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허둥대다가 그 자리에서 우아앙 크게 울어 재껴 버린다. 기분이 좋으면 한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는데 그 순수함이 넘치는 천진한 표정은 정말 사랑스럽고 어린 천사를 만나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힐링이 될 정도였다. 다은이는 물감 색칠을 좋아하고 동물을 즐겨 그렸다. 물감 색칠을 즐기다 보니 연습량이 많아져 물감은 잘 다루었으나 동물의 다리 개수는 한 번도 맞게 그린 적이 없다.
네발 동물의 경우 다리를 어떤 날은 다섯 개로 그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세 개로 그리기도 했다. 사진을 보여 주고 다리를 하나하나 세면서 설명해 줘도 다리 개수를 틀리게 그려 놓았다. 7살 아이 그림인데 아이다운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을 수 있다. 아이의 그림 표현은 지지하고 존중해 줘야 한다며? 하지만 다은이는 경우가 달랐다. 수학 학원은 아예 등록이 취소됐다고 했다. 수 개념이 전혀 없어서 수업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아이들은 그림 자체는 표현이 서툴러도 다리 개수는 맞게 그린다. 다은이는 수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동물 다리를 바로 셀 수 없었고 그에 따라 그림에서도 다리 개수를 맞게 그릴 수 없었다.
그리기는 단순히 '그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동의 발달 상태, 학습 능력이나 지능까지도 파악이 가능하다. 또 평면 작업인 그리기에서 벗어나 입체 작업을 하거나 글과 그림을 엮어 보는 융합 활동 등을 해 보다 보면 미술 이외의 능력이 탐지될 가능성도 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글을 잘 쓸 확률도 높다. 글 쓰는 데 필요한 능력과 그림 그리는 데 필요한 능력에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상상력, 관찰력, 표현력, 묘사력, 창의력, 집중력, 사고력 등이 그렇다. 그림이나 글이나 주제를 정하고 그것에 맞게 끝까지 완성해 나가는 것과 전체를 구성하는 능력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는 관찰화도 시작하는데 관찰화는 소묘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소묘’의 한자는 ‘素猫’. 素는 흴 소, 본디 소, ‘描'는 그릴 묘. 바탕 즉 본질을 그린다는 뜻이다. 그리려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닮게 그릴 수 없다. 관찰화는 상상화와 달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묘사하는 것인데 그 대상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지 어떤 구성을 하고 있는지 그 생김새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려낼 수 없다. 관찰하는 동안에는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확히 관찰해야 하고 관찰하는 연습을 통해서 정확히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다. 그림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상상화만 중요한 것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내 생각으로로는 이런 훈련은 단지 그림을 그릴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통찰력까지도 연결되지 않을까 한다. 희망 사항이기도 하다. 흔히 그림 그리는 사람들 눈은 예리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긴 입시 때 몇 년 동안 석고상을 노려보고 관찰하면서 그리는 데생 훈련을 해놓고도 눈이 무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긴 할 것 같다.
아이가 취학 전, 저학년 때 미술 활동이 많으니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정도의 인식이 대부분이고 또 미술이야 저학년 때나 비중이 있지 고학년이 되면 크게 문제 될 것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취학 전후 연령대의 아동들에게 미술 활동은 단지 미술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과 아이들에게 있어 그리기와 미술활동은 그렇게 단순한 분야가 아니라는 것, 아동의 발달 과정에 일종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인식 또한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