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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ree Dec 20. 2024

머리에만 비가 오는 그림, 스트레스 진단화




비가 오는데 머리에만 비가 올 수 있을까? 그것도 사방에서 머리를 향해 꽂히는 비, 그런 말도 안 되는 비가 미술치료 테스트 중 스트레스를 진단할 수 있는 그림인 ‘빗속의 사람 그리기’에서는 내린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 테스트를 해 보면 흔하지는 않고 어쩌다 한 번씩 머리가 밤송이처럼 보이는, 머리에 작대기가 잔뜩 꽂혀 있는 사람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 비가 잔뜩 열 받은 머리에만 집중적으로 내린다면 머리가 시원해질 만도 하긴 하겠다.




뒷모습이 아니라 정면을 그린 것인데 얼굴의 이목구비가 없고 손도 없이 비가 머리의 사방에 꽂혀 있다.





‘빗속의 사람 그리기’ 테스트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받고 있는지, 스트레스에 대처할만한 수단과 방법은 가졌는지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신뢰도 높은 테스트이다. 제시어는 ‘빗속에 있는 사람을 그려라.’ 이 테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한 번씩 나를 웃겼던 그림이 있는데 빗속의 사람을 그리라고 하니까 사람을 빗방울 안에 가둬 그려 넣는 아이들도 가끔 있었다. 이런 경우는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후로는 ‘빗속의 사람을 그려라, 비 오는 데 있는 사람을 그리면 되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해 줘야 했다. 한 아이는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나하나 웃고 있는 표정으로 크고 예쁘게 그려 놓았다. 그림이 얼마나 밝고 즐거워 보이는지 스트레스 거리가 있어도 개의치 않고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비의 양은 스트레스의 양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 비의 양은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은 10만큼의 비가 오고 있어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스트레스의 양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5만큼의 비 와도 10만큼의 무게로 느낄 수 있다. 그림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 어이쿠, 이 정도의 비가 오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겠는데? 싶어도 당사자는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뭐, 저 정도는 우산 안 써도 되겠다 싶은 정도의 약한 비라도 당사자는 꽤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산의 크기가 인물의 크기에 비해 너무 크다면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에너지의 크기가 큰 것으로 우산이 너무 작다면 반대 경우로 해석한다. 타인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그림도 꽤 있는데 타인의 스트레스까지 감당하려는 의미로 본다. 서두에 적은 머리에만 비가 꽂히는 경우는 그림을 그린 당시에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집중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야말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골칫거리가 있는 것이다.




글의 이해을 위해 부분적으로 넣었습니다. 설명이 들어가 있어서 저작권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문제 시 삭제합니다.




단순히 비만 오는 게 아니라 바람까지 불거나 큰 구름이 있고 천둥, 번개가 치면 그만큼 강력한 스트레스가 된다. 비가 와서 물웅덩이가 생겼다면 오랫동안 묵은 스트레스가 된다. 그림에 그려진 인물이 우산을 쓰고 있다면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편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장화나 우비도 마찬가지다. 우산도 없고 우비나 장화도 없지만 가방을 우산 대신 쓰고 간다거나 건물 처마 밑에라도 몸을 피했다면 그나마 스트레스에 대비하거나 해소하는 방편이 있다고 본다. 우산도 우비도 장화도 없고 맨몸인 채로 그려졌다면 아무런 대책 없이 스트레스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다. 우산도 쓰고 우비에 장화까지 신고 밝은 얼굴을 한 경우는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편을 충분히 갖고 있어서 스트레스 상황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치료 테스트 그림에서는 중의적이거나 교묘하게 위장하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보이는 그대로 해석한다. 신기한 것은 아이들이 스케치북에 그리는 그림에서는 사람을 그릴 때 표정을 다양하게 그리거나 자세하게 그리거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미술치료 테스트 그림에서는 아주 다양하고 섬세하고 자세하게 그린다. 점 한두 개와 짧은 선으로 그렇게 감정이 그대로 반영된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왜 그럴지 생각해 보니 스케치북에 그리는 그림은 보통 특정 주제가 주어진 그림이고 사람 자체가 주제는 아니었지만,  미술치료 테스트에서는 사람이 주제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 보니 표정이 자세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다. 반대로 얼굴을 가린 채로 그리는 경우도 있다. 커다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다든가 모자를 푹 썼다든가 우산으로 가렸다든가. 자기 감정을 숨기고 싶은 것이다. 아예 뒷모습으로 그렸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내 옛날 작업실은 야트막한 언덕 중간에 위치했었다. 1층이었고 여름에 문을 조금 열어두면 언덕 아래쪽으로 전봇대가 하나 보였다. 그 전봇대 밑에는 동네 사람이 갖다 버렸을 1인용 소파가 한참이 지나도 치워지지 않은 채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그 자리에,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그 자리를 지키느라 계절 따라 색은 바랬고 동네 고양이들도 가끔 올라가 앉아 있곤 했다. 지금처럼 분리수거 하던 시절도 아니라 스프링이 꺼진 그 낡은 소파는 계절이 지나도 계속 그 자리에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동네 아주머니가 종종 그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분으로 가정도 있고 자녀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그녀를 ‘책 읽는 여인’이라 칭했다.







그런데 가끔 밖을 내다 보면 보이는 그녀에게 책은 소품에 불과해 보였다. 조용히 책을 보는 적은 본 적이 드물었고 보통은 잔뜩 화가 나서는 허공을 향해 큰 소리로 혼자 떠들기를 반복했다. 전진만 있을 뿐 절대로 후진하지 않는 마을버스가 지나갈 때면 그녀가 목청껏 떠드는 말소리와 낡고 작은 버스가 기를 쓰며 언덕을 올라가는 소리가 뒤엉켰다. 하루는 도대체 뭐라고 떠드나 귀를 기울여 봤는데 믿었던 누군가에게 정신적, 금전적으로 크게 배신당했던 것 같았다. 아, 그래서 저렇게 정신 줄을 놓게 됐구나. 또 그녀는 근처 전봇대 밑둥에 검은색 매직으로 차량 번호를 적어 놓았다.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래져 글씨가 흐릿해지면 또다시 진하게 적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이게 도대체 여기에 왜 쓰여 있는지 기이해 보일 터였다. 그녀가 당시 스트레스 진단 테스트 그림을 그렸다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면 그 정도로 정신 줄을 놓을 수 있는지 가끔 그 책 읽는 여인이 생각나곤 했다.







여기, 정신 줄까지 놓지는 않았지만 극한 스트레스로 자율신경이 망가져 온갖 증상에 시달리고 갑상샘암에 걸릴 뻔한 사람이 있다. 세포 검사 결과, 스트레스 암이라고 불리는 ‘갑상샘 암’이라고 해서 갑상샘 반 절제 수술을 했는데 세포 변이가 생기긴 했으나 암은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단다. 수술 후 스트레스가 더 가중됐다고 했다. 수술 전부터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당시엔 전혀 잠을 못 자고 이틀을 꼴딱 새는 건 예사였고 잠이 안 와 하도 뒤척여서 등이 닿는 침대 패드 부분이 구멍이 숭숭 났을 정도였다고 한다. 밤에는 동틀 때까지 잠이 안 오고 낮에는 금방이라도 잘 수 있을 것처럼 너무 졸린데 그렇다고 잠에 빠지지는 못하는 증상이 너무 괴로웠다고. 이런 극심한 불면증에 우울증을 장기간 두어 차례 겪은 후유증으로 현재 뇌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다고 한다. 그녀는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지만 지금은 폰을 손에 쥐어드는 순간 뭘 검색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끝내 기억해내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3초 기억력'이라 불리는 물고기보다도 못하다.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마침 이 딱하고 불쌍한 그녀가 당시에 그린 스트레스 진단 테스트 그림이 내 수중에 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정도가 굉장하다. 그 큰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비, 비라고 할 수 없을 만큼의 물 폭탄이 쏟아지고 있고 바람까지 분다. 인물의 크기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다. 인물의 크기는 자아의 크기로 해석한다. 무자비해 보이는 물 폭탄은 곧 인물 위로 콰르릉 쿵쾅 쏟아지게 생겼고 삼지창처럼 찌를 듯이 거칠고 공격적으로 보인다. 사람은 곧 물살에 떠밀려 갈 판이다. 지면에 껌딱지처럼 작게 붙어 있는 사람은 우산을 쓰고 있기는 하나 어디 저 거대한, 지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나 있을까?







옛 노래에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란 노랫말이 들어가는 노래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노래였는데 미술치료의 주제곡이라 불려도 무방할만하다. 위의 그림을 저작권 걱정 없이 그림 전체를 공개할 수 있는 건 실은 내가 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십오 년 전쯤에 눈물을 찍어내며 일기를 쓰다가 그린 건데 내가 미술치료를 배울 당시에는 '빗속의 사람 그리기' 테스트 그림을 배우지 않았었다. 일기를 쓰다가 웬일로 그림 그릴 마음이 생겨서 무심히 옆 페이지 그렸는데 알고 보니 스트레스 진단 테스트를 해 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동적 가족화’와 ‘학교 생활화’ 외에 이 테스트를 추가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우리가 스트레스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오히려 적당한 스트레스가 삶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 스트레스 없이 살아갈 수 없다면 '빗속의 사람 그리기' 에서 진단 기준이 되는 우산이나 우비, 장화에 해당하는 스트레스 대처법이라도 있어야 한다. 병이 생길 정도의 스트레스는 어린 아이고 어른이고 간에 말아야 할 일이다. 스트레스 받는 삶의 반대는 재미나게 사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미루기만 해 왔던 글을 쓰고 있다. 진작 쓸 걸 그랬다.











제가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전문가께서 이 글을 읽고 문제가 되는 부분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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