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담이와 솜이 남매의 엄마다. 퇴근길에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학원엘 자주 들렀기 때문에 대화할 기회가 많았고 나와는 나이도 비슷해 친근함이 있는 학부모였다. 벌써 며칠 전에 남매 모두 미술치료 테스트를 해 두었고, 수업은 끝났고, 퇴근만 남겨 두고 상담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후드득 눈물을 떨궜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눈물을 훔치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시선을 무릎 위에 둔 채 이까짓 눈물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남편한테 사랑받았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위로에 약한 나는 할 말을 얼른 찾지 못했다.
담이가 그린 동적 가족화에는 네 가족 중 아무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가족 없는 가족화. 넓은 거실이 화지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귀퉁이에 아버지의 서재가 있는데 자세하게 그린 바퀴가 강조된 빈 의자만 빼꼼히 보이는 그림이었다. 남매의 아빠도 종종 뵈었는데 아빠 대신 그려놓은 것 같은 서재의 멀리 보이는 의자가 그 아빠처럼 깐깐해 보였다. 아빠가 서재의 의자에 앉아 계신 걸로 그렸다고 치더라도 뒷모습이 보이는 구도다. 뒷모습은 그려진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해석한다. 그림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거실 바닥은 연필로 거칠게 칠해져 있다. 바닥을 그렇게 전체적으로 음영 처리 정성이면, 네 가족 중 누구라도 그려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담이는 그러지 않았다. 미술치료 테스트 그림에서 이런 음영 처리는 스트레스로(인물에 했다면 분노나 적개심) 해석할 수 있다. 담이의 가족 그림이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다. 남매의 엄마, 그녀는 담이가 그린 그림에 대한 설명을 다 듣지 않고도 왜 이렇게 그렸는지 너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 사연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서 그간의 서러움에 왈칵 눈물이 났을 것이다. 아빠를 잘 따르고 좋아한다던 담이는 아빠는 왜 안 그렸을까, 왜 가족 중 아무도 그리지 않았을까?
담이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가족화에 가족 중 아무도 그려 넣지 않는 아이들이 간혹 있다. 상담하다 보면 이렇게 그린 아이들의 어머님들은
“아, 집에 공사를 하느라고 모두 집을 비운 적이 있었어요. 그날을 그린 거네요.”
“가족이 모두 출근하고 학교 가고 하다 보니 집에 누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그렸나 봐요”
이런 식으로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그래서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다. ‘동적 가족화’는 가족 간의 역동성을 보는 것이다. 그릴 때의 제시어는 '너 자신을 포함하여 가족 모두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장면을 그려 보라고 한다. 너 자신을 그리는 것도 잊지 말라'라고 한다. 아무도 그리지 않은 가족화는 가족 간에 상호작용과 역동성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가족 간의 정서적 친밀감은 없이 단절감만 있는 것이다. 저학년 때 그린 가족화에 아무도 그리지 않은 아이의 경우 고학년이 돼서 상담을 받으러 다닌다든가 분노조절 장애가 생겼다든가 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족 중 아무도 그리지 않은 아이들 몇몇은 공통으로 아무도 없는 텅 비어 있는 거실을 그렸다. 거실은 가족의 공동 구역이라는 점에서 아무도 없는 거실은 의미가 있다. 또 여러 명의 아이가 거실의 TV는 정면으로 크게 그려 놓았지만, 인물은 작게 그리거나 뒷모습으로 쪼르륵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다 같이 TV를 보고 있으니, 가족이 뭔가 같이 하는 모습이긴 한데 가족 간의 정서적 교류는 없다.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치는 그림이다. 가족이 다 같이 TV를 보는 그림을 긍정적으로 그린 아이들은 가족을 정면으로 보이게 그리고 TV의 뒷부분을 그린다. 같은 내용이라도 이렇게 다르게 그린다. 어떤 아이의 가족화는 다른 건 아예 그려 넣을 자리도 없이 화지 전체가 TV의 뒷부분으로 가득 찼다. 뭔가 숨이 막힌다. TV만 늘 켜져 있는 채 혼자 떠들고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가족들과 보낸 시간을 장편 영화 필름으로 친다면 수많은 씬, 수많은 커트 중 단 한 장면이다. 그 많은 장면 중 가족이 함께 한 장면이 없을 수가 없다. 집에 공사를 하느라 모두 집을 비웠을 때여야 아무도 없는 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 장면을 골라서 그린 것이다. 어떤 아이는 가족 소풍을 가서 곤충 채집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엄마가 없었다. 엄마가 벌레를 싫어해서 없는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곤충 채집이 아닌 엄마도 함께하는 장면을 그리면 될 텐데 이 아이는 엄마가 빠질 수밖에 없는 장면을 골라 그린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또 어떤 아이는 가족 중 한 사람을 그렸다 지웠다, 종이가 해지도록 반복하다가 결국 뒷장에 그리거나 빼고 그린다. 그리고 지우 고를 반복하는 것은 해당 인물에 대한 갈등으로 해석한다. 왜 뒷장에 그렸는지 물으면 그릴 데가 모자라서 그랬다고 한다. 핑계다. 뒷장으로 배제한 것이다. 그래도 아예 안 그린 것보다는 나은 것으로 해석한다. 가장 심각한 정도는 아예 그리기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숨어 있는 마음으로는 ‘가족’이라면 생각도 하기 싫은 정도랄까.
그리기를 거부한 예는 드물게 간혹 있었다. 고학년 여자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아이의 마음속에 가족이란 어떤 모습이길래 안갯속을 헤매는 것 같은 눈을 하고선 그 어느 장면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 마음속 공허함의 깊이를 감히 생각할 수 없다.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그래도 이 아이는 뭐라도 그려보려고 한참을 앉아 있었으니 그리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본인도 애를 썼으나 불가능했던 것이다. 한 중학생 남자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어느 틈엔가 도망을 가버렸다. 이 아이들의 가족, 부모님이 겉으로 보기에 어떤 눈에 띄는 문제가 있는 가정은 아니었지만, 이 아이들 마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사춘기였던 까닭도 없지 않아 있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미술치료 테스트를 하는 데 있어 심리적인 저항을 받게 되면 순조롭게 그리지 못하고 자꾸 딴소리를 해댄다. 선생님, 연필이 부러졌어요. 선생님, 지우개가 너무 작아요. 선생님, 뭐가 어째요, 뭐가 저째요 하면서 밥 먹기 싫은데, 식탁에 앉아 투정하는 아이처럼 몸을 꼬아댄다. 미술치료 테스트를 할 때는 이러한 과정, 그림 그릴 때의 태도나 표정, 그림 그릴 때 어느 부분에서 저항받는지도 눈여겨봐야 한다.
미술치료를 배운 후로 십이 년 동안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동적 가족화 테스트를 하다 보니 상당한 양의 그림이 쌓였다. 이 동적 가족화를 구분해 보자면 평범한(부정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있는) 가족화 > 불안정한 가족화 >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가족화 > 이상적인 가족화 ≧ 그리기를 거부 순으로 비중이 나뉘었다. (이 구분의 기준은 개인적인 판단이다.)
부정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있는 가족화는 전체 그림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부정적인 요소가 조금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다양한 형태의 갈등은 있지만 그래도 가족 구성원이 모두 그려져 있으면 평범한 가족으로 간주했다. 어느 집이나 각자 다른 형태로 이런저런 갈등을 겪으며 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평범한 형태의 가족화란 생각에서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적인 요소란, 뒷모습이나 측면을 보이는 인물, 가족 구성원이 모두 등장하기는 하지만 같이 뭔가를 하는 모습은 아닌 각자 자기 영역에서 자기 일을 하는 모습 정도다.
불안정한 가족화는 자기 혼자만 그려져 있다거나 가족 구성원 중에 어느 한 사람이 빠져 있거나 아니면 가족이 아닌 사람이 등장해 있는 경우, 인물이나 화지의 상부나 하부에 선이 그어져 있는 것으로 구분했다. 상, 하부의 선은 불안감을 의미한다.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자주 한다든지 이혼 얘기가 오간다든지 등으로 아이들이 불안을 느낄 때 등장할 수 있는 선이다. 화지의 상부 선은 기다란 구름이나 커튼의 가로로 긴 부분 등으로, 하부 선은 기저선으로 흔히 위장된다. 만약 어느 한 인물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면 그 인물 발밑에만 가로선을 그어 놓을 수 있다. 불안하니까 선을 받쳐 안정감을 구하는 것이다.
가족 중 구성원이 빠진 경우는 그 대상에게 양가감정이 있거나 마음속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경우로 본다. 예를 들면 같이 살고 있는 조부모님을 그리지 않는다거나 형제, 자매를 빼고 그린다거나. 같이 사는 가족인데 빼는 것과 반대로 가족 아닌 사람을 그리는 경우도 있다. 엉뚱하게 길거리에 있는 경찰관을 그렸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족이 아닌 인물이 등장한 경우는 정작 가족 중에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을 때 등이다. 부모님이 미용실을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가족화를 미용실을 배경으로 그렸다. 엄마 아빠는 손님들 머리를 하고 있고 자신은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그림이다. 미용실이 배경이다 보니 앉아 있는 손님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어서 나도 처음엔 가족화에 다른 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을 놓칠 뻔한 그림이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가족화는 신체 왜곡이 심하거나 가족화에 아무도 등장하지 않거나 하는 등의 경우로 봤다. 한 일곱 살 남자아이는 동적 가족화로 나무로 의인화된 가족을 그렸는데 나무마다 전부 도끼로 찍힌 자국이 있었다. 아이 어머님과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사연은 이렇다. 유학 중인 아빠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고 있던 엄마가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겠다고 조르던 아이에게 돈 얘기를 하면서, 엄마가 혼자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언성을 높여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했다. 현실적인 돈 문제를 마트 한 복판에서 일곱 살 아이에게 조목조목 따지며 얘기했다는 것. 아이어머니와의 상담 후, 도끼의 의미는 ‘돈’인 것 같았다. 돈 때문에 상처 입은 가족 아니 상처 입은 정도가 아니라 가정이 붕괴할 지경으로 보이는 그림이었다. 가족이 돈 때문에 떨어져 살게 되었고 엄마는 돈 때문에 힘들고, 아이가 느끼기에 우리 가족의 모든 문제는 돈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에서는 도끼에 여러 번 찍힌 나무도 있었고 부러진 상태만 아니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도끼에 찍힌 자리가 넘어갈 것 같은 나무도 있었다. 자칫 위험해 보이는 가족화였다. 이렇게 아이들의 그림에는 아이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 이제 이상적인 가족화가 남았다. 동적 가족화에서 가족 구성원을 뒷장에 그렸거나 빼거나 하지 않은 그림. 인물 간의 정상적인 서열이 지켜지면서 가족 모두 정면을 보고 있는 그림. 표정이 밝거나 웃고 있으며 서로 심리적으로 건강한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림. 다 같이 뭔가를 하고 있어서 가족 간의 상호작용이 있는 그림. 어느 인물의 크기가 유독 크거나 작거나 하지 않고 적당한 비례로 그려져 있으며 CF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이상적인, 화기애애한 가족화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10%? 1%? 아니다. 수 백장 중 달랑 서 너 장이다. 십 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아이들에게 그려보게 한 가족화 중에서 말이다. 이런 그림을 그린 아이들은 0.1%의 행운아들일 것이다.
동적 가족화 테스트를 포함한 학교 생활화, 스트레스 진단 테스트를 하고 나서 상담할 때 미리 얘기해 두는 부분이 있다. 미리 설명하지 않으면 테스트 결과 건강하지 않은 그림을 보고 부모 입장에서 너무 걱정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보려는 그림에서 부정적인 부분이 있더라도 너무 걱정은 마시고 참고하시면 된다. 과거와 미래와는 상관없이 현재의 마음 상태에 해당하는 그림이고 얼마든지 또 변할 수 있다고. 그림 지도하는데 참고용으로 그린 건데 부모님과도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상담을 요청한 거라고 말씀드린다.
이 글을 읽고 미술치료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독자들이 검색해 보고 나서 혹시 아이들에게 가족화를 그려보게 시도해 보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다. 내 지인 중에 아이에게 가족화 테스트를 해보고 싶으니 그림 좀 봐 달라고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문제는 엄마가 지켜보고 있으면 대체로 테스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옆에 있으면 훈수를 두기 시작한다. 아이가 얼른 그리지 않고 있으면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것인데
"왜, 우리 그때 가족여행 갔었던 거 그리면 되잖아, 그거 그려라."
"다 같이 송편 빚던 거 그리면 되겠네, 그거 그려봐."
이런 식이면 미술치료 테스트의 의미가 없다. 테스트 진행자가 옆에 있어도 이런데 집에서 미술치료 테스트를 진행하는 사람 없이 인터넷 검색 정도를 통해서 그리게 되면 십중팔구는 제대로 테스트하기 어렵다. 부모 입장에서 행여 아이가 부정적인 내용을 그리기라도 한다면 그걸 그냥 두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긴 누구나 내 가정은, 내 가족은 서로 행복하다고 여기기를 바랄 테니까. 이해는 간다. 가족 간에 서로 위해 주고 힘이 돼 주고 그 존재만으로 든든하기를 원하니까. 매일 지나다니는 거실이 쓸쓸하길 바랄리는 없다. 따뜻한 온기로 충만하길 원한다. 우리 마음이 다 그렇기는 하다.